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3일 오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행사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제주=뉴시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3일 제주 4·3 사건에 대해 “김달삼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 위원장이 350명의 무장 폭도를 이끌고 일으킨 폭동”이라고 말해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이와 함께 온라인 상에선 홍 대표가 언급한 김달삼에 대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달삼 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 위원장. 사진=구글 이미지 자료

김달삼의 제주도 대정 출신의 사회주의자다. 그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 제주도에 주둔하는 군과 평화 교섭을 주도하기도 했었다. 그의 본명은 이승진으로 김달삼이라는 가명은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가이자 장인인 강문석이 쓰던 이름을 이어받아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었다.

김달삼은 해방 후 1946년 10·1 대구항쟁에 관여했고, 1946년 10월 20일부터는 고향 제주도로 귀향한 후 대정공립초급중학교 교사로 재직했었다. 1947년 8월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조직부장이 됐고 1948년 4·3 항쟁 후 남로당 제주도당책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됐다.

그는 홍준표 대표의 주장과 달리 남로당계 교사로 첫 봉기 후 수습과정에서 무장봉기를 주도하기보다는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는 홍 대표가 1949년 6월 7일 사살 당한 4·3 사건의 주동자 이덕구와 혼동한 것으로 분석된다. 제주지역 향토문학 작품 일부에선 이덕구를 ‘산사람 대장’으로 기리고 김달삼은 ‘도망자’로 취급하기도 했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일명 해주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났고 9월 2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된 조선최고인민회의에서 49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후 북한에 남았기 때문이다.

김달삼은 북한으로 넘어간 뒤 강원도와 경북 일원에서 인민유격대 제3병단을 지휘했다. 그는 한국전쟁 전인 1950년 3월 22일 비정규군 빨치산으로 국군 8사단과 교전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사망한 곳인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에는 남한에서 두번째로 긴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수의 문헌과 기록이 제주 4·3 사건에 대해 당시 3·1절 행사 등에서 경찰의 편파적인 혁신계 단속과 우익계열 서북청년단 행패 등이 봉기의 1차적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제주 4·3 사건 당시 김달삼과 교섭을 했던 고 김익력 장군은 “나는 경찰의 최고책임자인 조병옥씨와 토벌사령관 김정호씨가 제주도에서 동족에게 자행한 초토작전의 만행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전형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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