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신앙있는 남자라면”… 마부를 남편으로 섬기다

마부 박유산·한국 첫 여의사 박에스더 부부와 서울 정동

예술적 건축디자인을 자랑하는 이화외고 교사. 서대문 쪽 정문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 이 정문 앞에 서대문 전차 정거장이 있었다. 이화외고 이화여고 이화여대 전신인 이화학당은 스크랜턴 선교사가 1886년 열 살 남짓한 소녀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한 우리나라 첫 근대식 여성교육기관이다. 첫 여의사 박에스더는 이화학당 네 번째 학생이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정동길을 따라 서대문 쪽으로 600m쯤 걸어가면 아담한 팔작지붕 대문이 나온다. 옛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 전신) 교문이다. 사주문(四柱門) 양식의 이 문은 일제 강점기 일본풍으로 교란됐다가 제 모습을 찾은 게 1999년이다. 1890년 전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문 앞에 비석 하나가 서 있다. 허리춤 높이의 이 돌에는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階下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말을 탄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서 내리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서원 입구에는 반드시 이런 하마비가 있었다. 배움의 자리에 들어갈 터이니 말에 내려 옷깃을 여미고 말을 삼가라는 의미가 담겼다.

이화학당 시절의 박에스더(노랑색 원). 서울 정동 이화박물관에 걸린 사진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명성왕후의 영어통역관이 되고자 찾아온 김 부인에게 선교사가 영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됐다. 메리 스크랜턴(1832~1909) 여사가 설립한 첫 근대식 여성교육기관이 이화학당이다. 이화학당 두 번째 학생은 가난한 어머니가 딸을 양육할 수 없어 맡긴 별단이, 세 번째는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버려진 꽃님이다. 그리고 네 번째 학생은 훗날 우리나라 첫 여의사가 되는 박에스더(본명 김점동·1877~1910)이다.

김점동은 이화학당에서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받고 김에스더로 불렸다. 마부(馬夫) 박유산(1868~1900)과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르는 서양의 방식에 따라 박에스더로 살았다. 박유산은 본래 이름이 박여선이었으나, 선교사들이 영어로 발음하면서 박유산으로 굳어졌다고 ‘꿈을 찾아 떠난 젊은이들’ 저자 이강렬이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인 첫 유학생사를 다뤘다.

박유산·박에스더 부부(1868~1900)(1877~1910)

여의사 박에스더와 마부 박유산.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마부가 어떻게 당시 최고 엘리트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을까. 마치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재벌집 딸과 그 집 운전기사의 사랑을 다룬 아침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에스더의 아버지 김홍택은 서울 정동에 사는 양반으로 딸만 넷을 두었다. 김홍택은 선교사 아펜젤러에게 고용돼 신문물을 익혔으며 그 영향으로 큰딸 에스더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둘째 김마리아를 정동여학당(정신여고 전신), 넷째 김배세는 정동여학당 후신인 연동여학당에 보낼 만큼 열린 인물이었다. 셋째는 일찍 시집갔다.

열 살 소녀 에스더에게 선교사와 서양식 문물의 경험은 신비로웠을 것이다. 1890년 10월 의료선교를 위해 조선에 입국한 이화학당 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은 에스더가 자신들을 보고 놀란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에스더는 코가 큰 우리 얼굴에 놀랐으며, 난로를 보고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우리들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게 됐다.’

히화학당이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화박물관. 사진 오른쪽 동상은 유관순 열사.

로제타를 만난 에스더는 그의 지도 아래 한국인 첫 여의사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888년 로제타 일기의 한 대목이다.

‘폭풍우가 심했던 어느 날 밤. 에스더는 빗소리를 들으며 주님께서 노아의 방주 때와 같이 인간의 죄를 홍수로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친구들과 함께 기도했다. 이 기도 가운데 심적 변화를 일으킨 에스더는 매일 밤 소녀들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열 살에 입학한 에스더는 ‘폭풍성장’을 했다. 1891년 1월 올링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 로제타의 조수가 돼 평양으로 내지 의료선교를 떠날 정도로 신앙심과 실력을 갖췄다. 로제타는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1892년 결혼했다. 그리고 부부는 관서지방 선교를 위해 평양에 부임했다.

박유산은 몰락한 지방 훈장의 아들이었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이나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버지의 근심을 샀다. 무엇보다 주유천하하길 좋아했다. 그는 어느 날 윌리엄의 마부로 고용됐고 그를 따라 말고삐를 붙잡고 전도여행을 다녔다. 윌리엄은 결혼 전 정동 선교부와 평양을 오갈 때 약혼녀 로제타를 이화학당에서 만나며 사랑을 키웠다.

옛 이화학당 정문. 1999년 원형 복원됐다. 문 앞에 하마비가 서있다.

박유산은 윌리엄 홀의 선교사역을 보고 신앙을 가지게 된다. 방황하던 그의 삶은 병든 자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달려가 정성스럽게 치료해 주는 선교사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고민했고 그 중심에 예수가 있음을 알았다.

신분 뛰어넘는 사랑, 서울 ‘선교부’ 정동길
하마비가 있는 정동길은 요즘 가로수마다 새순이 돋고 꽃이 핀다. 이 길을 이화여고 창덕여중 예원학교 학생들이 등하교한다. 120여년 전으로의 시간여행. 박유산이 정동길 하마비 근처에 윌리엄을 내려주고 말고삐를 매고 있을 때 에스더는 이화학당에서 의학수업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나라 첫 여성 의료기관 보구여관에서 조수로 활동하는 것을 몰래 지켜봤을 것이다. 그 보구여관 터는 하마비 아래쪽으로 100m 지점이다. 현 정동교회와 이화여고를 가르는 담 쪽이다.

에스더와 박유산은 한 번도 본 적 없이 중매혼을 했다. 1893년 5월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조선 관습에 따른 조혼 압박을 에스더가 신앙 안에서 결단하면서 성사됐다. 당시 여성은 열네 살 무렵까지 혼인을 못하면 무당이나 병자 취급을 당했다. 사랑과 결혼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에스더의 꿈은 로제타와 같이 의료선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을 위해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의사가 되게 해달라고 서원했다. 그러기 위해선 유학을 가야 했다. 하지만 조선 사회에서 여성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장 평양 내지 선교여행조차 결혼 여부가 걸림돌이 됐다. 결혼하는 것만이 돌파구였다.

이 무렵 윌리엄이 박유산에게 물었다. “자네는 가정적인 여자와 하나님을 진실 되게 섬기는 여자 중 어떤 여자를 원하는가.”
박유산은 신앙을 택했다. 반면 에스더의 집에선 홀 부부의 박유산 추천에 반대를 표했다. 배움이 큰 여성이 대개 ‘상승혼’을 하는 마당에 몰락한 집안의 가장, 그것도 마부로 살아가는 박유산이 탐탁할 리 없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로제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내가 가사 일이나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결혼하고 싶지 않지만 조선의 관습상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마부 박유산에 대해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지체가 높고 낮음은 문제되지 않으며, 무엇보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 혼인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두 사람 모두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없더라도 하나님 뜻 안에서 순종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에스더는 결혼 1년이 지나자 박유산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로제타에게 고백한다.

그들은 정동에서 신식 결혼식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일에 충실했다. 에스더는 진료소에서 라틴명 약품을 익혔고 박유산은 평양 등을 다니며 제임스를 도왔다. 두 사람은 평양 선교를 위해 홀 부부를 따라 갔다가 외국 선교사에 대한 평양 관리들의 박해와 주민들의 배척으로 긴급 탈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유산은 선교사 앞잡이라는 수모를 당하며 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평양에 민간 환자가 속출하자 그해 10월 제임스와 박유산은 전장으로 나가 치료에 힘썼다.

그해 11월 말. 제임스가 발진티푸스로 순직했다. 로제타는 유복자와 두 자녀를 데리고 친정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에스더 부부는 로제타를 따라 나섰다. 로제타가 에스더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해 의사가 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스더는 뉴욕 리버티공립학교에 입학했고 1896년 볼티모어여자의대(현재 존스홉킨스대학)에 입학해 서양 의학을 전공한 첫 한국인이 됐다.(한성사학 24집 ‘조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정민재 논문)

125년 전 ‘상남자 교회오빠’ 박유산
박유산은 아내의 의대 입학을 두고 “내가 태어나서 세 번째로 기쁜 날”이라고 말했다. 예수를 만난 것과 에스더와의 결혼에 이은 기쁨이었다.

박유산은 미국 도착 후 줄곧 볼티모어 식당과 로제타의 친정 농장에서 일하며 에스더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는 영어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고 외조에 힘썼다. 그러면서도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고 상투를 틀고 다녔다. 1895년 7월 로제타와 그 자녀들이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이들 부부가 동행했는데 그때 찍은 사진에 상투 튼 박유산을 볼 수 있다.
볼티모어 공동묘지에 묻힌 박유산의 비. 그는 미국에서 노동자로 살며 아내의 의학 공부를 돕다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셉 같은 남편 박유산은 에스더가 의대 졸업 3주를 남겼을 때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투병 때 에스더는 병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편을 섬겼다. 에스더는 남편을 볼티모어 공동묘지에 묻고 로제타와 함께 귀국해 죽는 날까지 사랑의 의술을 펼쳤다. 그리고 1910년 4월 13일 박에스더도 폐결핵으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독립문 우뚝 서는데 박에스더 부부 기도도 있었다
“이 돈을 독립문 건축에 써주시오.”
보구여관 의사 커틀러가 미국으로 귀국하며 ‘독립신문’을 박에스더 부부에게 넘겨줬다. 신문엔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축한다는 모금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의료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과 그 자녀를 가운데 두고 포즈를 취한 박에스더(왼쪽), 박유산 부부. 홀 부인은 한국에서 남편 홀 박사가 의료선교 사역 끝에 순직하자 박에스더 부부와 함께 미국 볼티모어 친정으로 돌아갔다.

부부는 기도로 3원을 마련했다. 그리고 독립협회로 보냈다. 1910년 당시 쌀 한 섬이 3원이었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에 적잖은 금액이었다. 부부의 헌금을 두고 독립신문은 ‘이런 사람은 외국에 간제 얼마가 못 되야 발서 자기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도저히 생겟더라’고 칭송했다. 이역만리에서 일제 식민지가 된 조국 현실을 얼마나 안타까워했을까.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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