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3> 강성구목사

“하나님 화나셔” 어린 딸 말에 목회의 길로

강성구 목사가 독일 뷔르츠부르크 한인교회에서 유학생 목회를 할 당시 성가대 찬양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에 사는 파독 광부 출신 강성구(74) 목사가 최근 독일을 방문했다.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은 가족인 듯했다. 치열한 탄광생활을 지낸 옛 동료들이 함께 모였다. 당시 파독 1세대는 3년 계약 만료 후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독일에 머물거나, 미국·캐나다 등 제3국으로 떠났다. 강 목사는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경우였다.

그는 젊은 시절 서울 왕십리에서 전파사를 운영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친구가 ‘파독 광부 모집’ 신문광고를 오려왔다. 평소 그 친구는 프랑스로 날아가 피카소 그림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함께 파독 광부 모집에 지원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신체검사에서 낙방했다. 1970년 6월 강 목사는 친구를 뒤로하고 혼자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엔 난감하더군요. 탄광 경험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광산 책임자가 전기 기술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손을 번쩍 들었더니 그때부터 배터리 충전과 고치는 일을 주로 했어요.”

3년 계약이 끝나고 경력을 살려 ‘그래츠(Graetz)’라는 텔레비전 생산공장에서 6년간 일했다. 79년 파독 간호사인 아내와 딸을 데리고 미국 시카고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텔레비전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이국땅에서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어릴 때부터 믿은 주님께 더욱 매달렸다. 어느 날 목회자인 처형이 부흥집회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처형은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 받은 권면을 그에게 전달했다.

1976년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왼쪽 두 번째)와 성가대 지휘자인 나영수씨 등과 집에서 촬영한 사진. 오른쪽 세 번째가 강목사다

“처형이 하는 말이 제가 종의 사명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러자 처형이 기도를 해보라는 겁니다.”

3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날씨가 더워 온 가족이 에어컨이 있는 아래층 가게에 앉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멀쩡하던 간판이 ‘와장창’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옆에 있던 다섯 살 딸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빠, 하나님이 화났잖아요. 아빠가 큰이모 말을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화난 거라니까요.”

문득 충성스러운 당나귀가 발람 선지자를 꾸짖는 성경말씀이 떠올랐다. 깨닫게 하려고 어린 딸의 입을 빌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이름도 바꿨다. 강 목사의 원래 이름은 강상구였다. 기도해주시는 목사님의 권유로 갈라디아서 5장 22절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인 ‘성구(聖九)’로 이름 지었다. 기도 중 응답을 받고 종의 길을 걷고자 결단했다. 곧바로 짐을 꾸려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80년부터 신학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웨스트코스트크리스천대(West Coast Christian College)에서 학사를, 월드미션대(World Mission University)에서 석사과정을 우등으로 마쳤다.

그는 불교 가정에서 자랐다. 8남매의 장남인 그는 동생 4명을 잃었다. 절망이란 감정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었고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북한에서 피난 온 여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처음 만났다. 16세 때였다. 전봇대에 퓨즈가 나가 교체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감전됐다. 정신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다 전봇대 쇠꼬챙이에 바지가 걸려 겨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며칠 뒤 감기가 폐렴으로 진행돼 남동생이 이틀 만에 세상을 떴다. 충격에 빠졌다. 마치 마르틴 루터가 벼락 맞은 친구를 보고 체험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깊은 기도에 빠져들었다.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다. 군대에 가서는 군종 하사관으로 근무하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독일에 와서는 탄광이 있던 보훔(Bochum)에는 한인교회가 없어 광부들끼리 예배를 드렸다.

“제가 독일에 온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미국도 마찬가지고요. 독일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열심히 사업을 해서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길 원하셨어요.”

1972년 광산 동료들과 함께했다. 맨 왼쪽이 강 목사.

그는 신학공부 당시 ‘만약 목사가 되면 다시 독일에 와서 선교하겠다’고 서원기도를 드렸다. 그의 바람대로 92년 LA 동양선교교회의 지원을 받아 다시 독일 선교사로 파송됐다.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원래는 파라과이로 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사역하던 분이 일이 생겨 갑자기 미국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독일로 향하게 됐다. 미군부대가 있는 카이저스라우테른(Kaiserslautern)이라는 도시였다. 하지만 이후 미군이 독일에서 철수하면서 교세가 축소됐고, 97년부터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유학생 목회를 시작했다.

‘너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을 따라 10년간 불철주야 사역했다. 2007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강 목사는 독일을 잊은 적이 없다. 지난해 11월 심근경색 수술을 한 뒤에도 독일을 향한 기도를 쉬지 않고 있다. 그의 이번 방문도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번역된 성경을 배부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2007년 은퇴 후 아내 최명희씨(오른쪽)와 함께한 모습.

“하나님이 이 땅에서 얼마나 더 머물게 하실지 모르지만 생명 있는 날까지 나에게 주신 남은 코스를 잘 감당하길 기도할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선택을 요구할 때마다 순종했다. 믿음은 말이 아닌, 전적인 그분에 대해 반응하고 행동하는 것. 되돌아보니 그를 향한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고 고백한다.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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