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의 작은 천국] 평화가 있는 곳에 예수가 있다

코끼리, 암사자, 고래, 펭귄 같은 동물들은 어린 새끼들을 공동으로 돌보는 공동육아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암사자는 자신의 새끼가 아닌 다른 암컷의 새끼에게도 젖을 물린다고 합니다. 천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계에서 번성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요인도 대규모 집단생활을 통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우리’라는 말은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입니다.

평화는 아이들을 마음껏 웃고 즐길 수 있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다. 영동 물한계곡교회 교회학교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것이 2인칭이나 3인칭의 타자를 1인칭에 편입시킬 때 ‘우리’라는 말을 쓰는 이유입니다. 외부의 타자를 나와 일치시키는 정서와 태도가 이 말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몇 가지 단어가 있는데, ‘어린이’와 ‘노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의 이해를 넘어 모든 사람의 보편적 이해와 공감이 내재돼 있습니다. 이기적으로 처리할 때 갈등과 무질서가 일어나게 되는 일은 공공체가 함께 이해하고 처리할 때 훨씬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이와 노인은 공동체가 함께 돌봐야 할 약자’라는 생각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불문율(不文律)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식에 대한 이해와 감정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입니다. 그것은 질량이나 무게 따위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목숨을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궁극의 것이 자식입니다. 이 무량(無量)한 깊이와 넓이를 알 때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조건을 넘어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타자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고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조건은 타자의 존재를 내 안에서 느낄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 인해 타자화된 인간을 자기 안에 품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타자의 비루한 모습 가운데 성큼 들어가시는 하나님,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타자의 연약성을 이해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 낮고 천한 타자의 죄를 대신 지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예수의 하나님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타자에 대한 공감을 원천으로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 분노하고 벌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예수의 하나님은 그 스스로 인간의 연약성 가운데 찾아오시고 대신 채찍질 당하며 급기야 죽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정치적 배경에는 유대인의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이익만을 좇았던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신앙을 교조적인 정치이념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까지 죽게 한 것입니다.

타자를 희생시킨 대가로 나만의 평화를 누리려는 것은 위선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가짜 평화에 속고 살았습니다. 가짜 평화는 두려움과 공포를 생산하여 타자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깁니다. 경계선을 만들고 그것을 넘어가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뒤로는 그것으로 자기 이익을 챙깁니다. 예수님도 그 경계선을 넘었다가 못 박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따라 경계를 넘는 사람들입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그래서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두 화동(花童)과 함께 찍은 사진은 가장 가슴이 뭉클하고 감동적입니다. 서로의 경계를 넘어 손을 맞잡고 전쟁하지 않겠다는 것을 어린이 앞에서 어른들이 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있는 곳에 예수가 있는 게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있는 곳에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김선주 영동 물한계곡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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