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만한 세상] 이름 없는 ‘키다리 아저씨’의 1억

게티이미지뱅크

14일 고려대에 올해도 어김없이 1억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신분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학교 직원은 기부자 예우를 이유로 이름이라도 알려달라고 졸랐지만 “내가 누군지 뭐가 중요하냐”며 웃어 넘길 뿐이었습니다.

바라는 것은 단지 학생들이 아르바이트하느라 학업에 소홀해지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랍니다. 고려대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키다리 아저씨’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그는 올해로 4년째 매년 1억원을 학교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신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지만 고려대 출신이고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 정도로 전해집니다.

학업을 마치기까지 힘들었던 경험을 잊을 수 없어서 일까요. 어려운 상황에 놓인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마침 모교인 고려대서 처음으로 성적장학금을 없애고 돈이 꼭 필요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어 기부처로 콕 찝게 됐답니다.

기부자 예우도 일절 거절하고 오로지 ‘나눔’의 뜻만 간직한 ‘키다리 아저씨’ 는 비단 고려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대학가에 훈풍이 붑니다. 익명 기부금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거죠. 이달 2일 이화여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익명 기부자가 현금 495만원과 선물이 들어 있는 장바구니를 두고 갔습니다. 이대 측은 기부자의 뜻을 존중해 누구인지 찾지 않을 방침을 알리기도 했죠.

‘키다리 아저씨’에게서 장학금 혜택을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나도 저렇게 돼야지”라는 꿈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고마운 마음을 직접 갚을 길 없으니 사회에 환원하고 기부하면서 또 다른 선행을 베풀겠다는 겁니다.

또 타인의 기부 소식을 듣고 자극을 받은 이들의 기부도 꼬리를 물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최근 고려대에는 한 익명의 사업가가 “다른 사업가의 기부 소식을 보고 좋은 뜻에 동참하고 싶었다”면서 수백만원 상당 소나무를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선행 선순환 문화’가 될 아주 좋은 조짐입니다. 어려운 경기와 삭막해진 민심 탓에 움츠러든 기부 분위기가 ‘키다리 아저씨’ 덕에 조금은 녹아내릴 듯 합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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