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1980년 오월의 광주, 신앙의 양심으로 세계에 알리다

선교사 허철선과 광주광역시 양림역사문화마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고(故) 허철선(헌틀리) 선교사의 사택. 광주선교부가 있던 양림동 양림산 자락에 있다. 기독NGO ‘THE1904’ 등이 낡은 사택을 리모델링해 신앙유업을 잇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515갤러리 이승찬 대표 제공

지난 24일 5월의 신학교 캠퍼스는 꽃향기가 달콤했다. 신학과 학생들은 등나무꽃 아래서 기도모임을 하고 있었고, 음악학과 학생들이 치는 피아노 선율이 교사(校舍) 창문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광주광역시 양림동 양림산 자락에 위치한 호남신학대학. 학교는 1895년 미국 남장로교 유진 벨 목사의 호남선교와 함께 싹 트기 시작했다. 벨 목사는 당시 개항장 목포를 시작으로 나주 광주에 선교부를 세웠다. 캠퍼스는 작으나 양림동 일대가 선교부타운이어서 그 어느 신학대학보다 영적인 힘이 느껴졌다. 광주시 당국도 선교부타운의 가치를 높이 사 ‘양림역사문화마을’로 지정했다.


음악과 교사 뒤로 이어지는 양림산 숲길을 올랐다. 해발 108m의 나지막한 동산. 그 정상 숲에 들어서면 오래된 비석과 이를 중심으로 선교사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돌림병에 걸린 아이들이 죽으면 내다 버리던 풍장터였던 곳이다. 유진 벨은 이 산에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고 산자락에 학교와 병원, 교회를 세워 생명의 산으로 바꿔 오늘에 이르게 했다.

5월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췄다. 안장된 22기의 비석엔 저마다의 이름과 기도문이 적혔고, 그 문자마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았다. 한국명 배유지. 목사 유진 벨의 비문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EUGEN BELL 裵裕趾 1868-1925’. 최근 다큐멘터리영화로 잘 알려진 서서평(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1880~1934) 선교사도 여기에 묻혀 있다.

허철선(찰스 베츠 헌틀리) 1936~2017

그리고 지난 5월 18일 새로운 비석이 조성됐다. ‘목사 허철선 박사 1936.7.9-2017.6.26 미국장로교 선교사 1965-1985’. 한국명 허철선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는 그를 기억하는 믿음의 동역과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힘입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미국에서 유해로 돌아와 안장예배가 드려졌다.

그는 1965년 유진 벨과 그 후임자 선교사들처럼 가난한 한국 땅에 들어와 서울 순천 광주에서 20년간 사역했다. 미국 남장로교가 파송한 마지막 한국 선교사이기도 했다. 그의 비석 옆엔 안장예배 때의 조화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이처럼 그를 잊지 않고 안장예배 등을 이끌어 내며 헌신한 이들에게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엡 5:10)을 찾아 나선 손길이었을 것이다.

미 남장로교 마지막 선교사 허철선은 미 동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샬럿 출신으로 1950년대 미 명문 듀크대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로 유학한 엘리트였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황해도 해주지역 선교사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목사안수를 받고 65년 9월 한국으로 파송돼 서울과 순천 사역(1965~68년)을 거쳐 이듬해 광주선교부 광주기독병원 원목이 됐다. 1905년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병원은 80년대까지 호남 최고의 병원이었으며, 지금도 선교타운 양림동을 떠나지 않고 의료사역의 한 축으로 운영되고 있다.

허철선 선교사(왼쪽)와 그의 제자 차종순 목사(전 호남신대 총장)가 허 목사 사택 앞에서 그의 딸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1970년대 사진. 차종순 목사 제공

“허 목사님은 조용하고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우리와 외모만 다르지 이웃집 아저씨 같았어요.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줬지요. 밥을 사주고 차를 사주며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굳이 성경 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아, 그리스도인은 다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허 목사가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할 당시 지도했던 ‘영어성경공부반’에서 말씀을 배웠던 차종순 목사(전 호남신대 총장)의 증언이다. 그는 60년대 후반 양림교회 청년회장을 하며 신앙을 다졌고 장신대학 학생이 돼 허 목사의 영원한 제자가 됐다.

“가난한 분들이 기독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하면 허 목사님이 그분들 집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지역 교회와 연결해 드리곤 했어요. 광주는 물론 전남 도서지역까지 다니며 사랑을 베푸셨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손잡아 주시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저도 함께 따라다니며 통역으로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허철선 선교사가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으로 후송된 중상자 모습을 찍은 사진. 허 선교사는 당시 이 병원 원목이었다. 장헌권 목사 제공

허 목사는 1980년 소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기 전까지 “한국에서의 생활은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차분하게 술회했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독재정권이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을 돌보지 않고 인권을 짓밟았으나 그래도 선량한 국민은 서로를 도우며 가난에서 탈출하려고 애썼다. 선교사들의 헌신은 심령이 곤궁했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신군부가 1980년 5월 민주화의 열망을 총칼로 진압하는 참극이 벌어지면서 광주는 순식간에 고립됐다. 그해 5월 18일은 주일이었다. 전날 허 목사 가족은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러 대전으로 갔다. 네 자녀 중 맏이 메리는 샬럿 태생이었고 수잔과 제니퍼는 각기 서울과 광주에서 태어났다. 부부는 한국 땅에 보내준 하나님 은사에 감사해 한국 아이를 입양했다. 제니퍼보다 한 살 많았다.

그렇게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광주행 열차를 탔을 때 여느 때와 다르게 열차는 군인들로 가득했고 그중에는 술에 취해 흐트러진 이도 많았다고 했다. 신군부는 이튿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자비한 진압에 들어갔다.


‘… (대전에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광주의) 정황을 묻는 친구들 ▷전화를 쉴 새 없이 받았다. 주일 내내 거리의 시민들은 계엄군 공격을 받았다. 구타가 행해졌고 교도소로 압송됐다. 그날 아침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기독교인 상당수가 사전경고 없이 계엄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날은 한국역사에 있어 매우 슬픈 날이었다….’(허 목사 회고 ‘광주의 비극’ 중)

사실 허 목사에게 5월 18일은 참극 못잖은 아픔이 있었다.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던 어머니가 운명한 날이었다. 그는 광주를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이 하나님 명령 같았다. 5월 19일 광주의 모든 관공서와 병원 등이 소요로 문을 닫았다. 광주기독병원은 그래도 문을 열었다.

‘시민들이 병원에 실려 오기 시작했다. 온몸에 구타의 증표가 있었다. 이들은 계엄군으로부터 공격당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20일 정세 파악을 위해 병원 밖을 나섰다. 불타 버린 택시, 구덩이에 파묻힌 불도저, 부서진 방송국…. 이 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군인들에게 끌려간 젊은이들의 신발이었다. 이들을 어디로 끌고 간 것일까. 도시는 분노에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다음 날 (계엄군의) 총격이 시작됐다.’

호남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광주기독병원은 다행히 폐쇄되지 않아 사망자 중상자 경상자로 넘쳤다. 공포에 질린 이들은 여기저기서 하나님을 찾았다. 양림동 호남신학교 아래 그의 사택에는 20여명의 쫓기는 이들이 몰렸다. 겁에 질린 어느 선교사는 숨겨 달라는 그들의 간절한 청을 “들어와도 좋으나 아무도 없다고 거짓말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거부하기도 했다.

옛 사택 입구의 허철선 선교사를 기리는 입간판. 광주를 찾는 순례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는 총상 입은 이들의 X선 필름을 통해 계엄군이 M16 HP탄으로 살상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잔인한 성능 때문에 국제조약을 통해 군사적 사용이 금지된 탄이었다. 그는 사망자 몸에 박힌 총탄의 필름을 빼내 세계에 알렸다. 선교지 정치 개입을 금지한 선교사 수칙을 어긴 것이었으나 신앙의 양심문제라고 생각했다.

“허 목사님은 사택에 암실을 두고 있을 만큼 사진에 취미가 있으셨어요. 거리 참극과 병원 후송자 사진을 찍어 이를 인화해 광주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어요.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나오는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취재를 도왔다. 힌츠페터 기자가 인화작업을 벌인 곳도 바로 허 목사 사택 암실입니다.” 차종순 목사 얘기다.

지난 5월 18일 고 허철선 선교사 안장예배를 올린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원. 유진 벨, 서서평 선교사 등이 함께 이곳에 안장돼 있다.

차 목사는 “서서평 선교사와 함께 한국인의 정(情)을 이해하고 우리와 함께 울고 함께 웃던 마지막 선교사”라고 했다. 살육으로 정권을 쥔 신군부는 보이지 않게 허 목사를 압박했고, 한국교회가 자립하면서 미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가 1985년이었다.

지난달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에 허 목사의 아내 허마리아(77) 여사가 참석해 남편과 함께했던 1980년 5월을 증언했다. 한국을 떠난 뒤 30여년간 잊혀졌던 허 목사 부부는 2016년 ‘오월어머니상’ 수상자로 결정돼 연락이 닿았으나 허 목사의 건강문제로 수상을 늦추다 이듬해 5월 허 목사의 또 다른 제자 홍장희 목사가 대리 수상했다.

허 목사는 소천 1주일 전 대리수상 소식을 듣고 한국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지금 갈 수 없습니다. 죽으면 갈 수 있겠습니다.”

한국에 온 부인 허마리아 여사 “하나님 사랑 전할 수 있었던 마법 같은 순간”
올해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은 마사 헌틀리(허마리아) 여사가 남편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더했다. 헌틀리 여사는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었던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는 허철선 목사의 회고를 읽어 내렸다.

지난 5월 5·18민주화운동 기념행사에 참석한 허마리아 여사.

헌틀리 여사와 첫째 딸 메리, 막내 제니퍼는 기념식은 물론, 양림동 선교사 묘원 유해 안장식에도 참석했다. 이들이 멀리서 올 수 있었던 것은 허 목사와 광주 양림동의 신앙유업을 받들고자 했던 광주 기독NGO ‘THE1904’(대표 홍인화) 등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2014년부터 미 남장로교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시도했고 ‘마지막 선교사’ 허 목사의 사택을 리모델링해 선교사들이 남긴 신앙의 유산을 이어가고자 했다.

‘유진 벨에서 헌틀리까지’라는 아카데미, ‘허철선과 오월’ 등의 행사는 신앙의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글·사진=광주·순천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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