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뉴시스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한국 축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월드컵 경험만 무려 7번이다. 한국 축구의 역사와 함께한 ‘살아있는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홍명보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진 4회 연속 선수로서 참가했다. 이어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코치로 참가했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선 감독으로, 그리고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선 대한축구협회의 전무이사로 변신해 행정가로서 함께했다. 화려했던 선수시절을 거쳐 코치와 대표팀 감독, 현재 축구협회 임원까지 대한축구협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그런 그가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홍명보는 5일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 감독 선임 문제를 비롯해 한국 축구 전반에 대한 토론,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주역들에 대한 언급까지 다양한 발언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2002년 함께 했던 후배이자 방송 3사 해설위원들에게 “현장에 대한 경험이 더 좋은 해설의 기반이 될 것”이라는 쓴소리로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거세다.

그는 한국 축구의 오늘을 만든 과정이 됐고, 축구팬에겐 한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이 됐다. 지금 국민들이 기억하는 홍명보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화려한 선수시절부터 일희일비 했던 감독 생활과 우여곡절 끝의 행정가 모습까지. 그의 세 얼굴을 조명해봤다.

사진 = 홍명보 선수시절

◆ 화려했던 선수생활… 영원한 대표팀의 주장

아시아 최초 월드컵 본선 4회 출전, FIFA 창립 100주년 기념 역대 최고 선수 100인 선정, 아시아 축구 명예의 전당 10인 지명, 2002월드컵 주장과 4강, 그리고 아시아 선수 첫 브론즈볼 수상, 한국축구대표팀 역대 최다인 A매치 136회 출전.

모두 홍명보가 선수로서 이뤄낸 것들이다. 홍명보는 1994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25세에 대표팀의 주장을 달았다. 이는 지금까지도 역대 한국 대표팀 주장중 최연소 나이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한국축구를 이끌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월드컵인 2002 월드컵에선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다.

홍명보는 1990년 2월 4일, 노르웨이전에서 A매치 데뷔전을 가졌다. 이후 그해 9월 23일 중국 베이징 아시안게임 싱가포르전에서 데뷔골을 터뜨린다. 영원한 리베로, ‘골넣는 수비수’의 시작이었다.

이후 그는 1994년 미국 월드컵 직후 당대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비록 2무 1패로 16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당시까지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 성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독일 같은 강팀을 상대로 이뤄낸 것들이었다. 독일전과 스페인전에서 보여줬던 그의 환상적인 중거리슈팅과 골은 아직도 많은 축구 팬들에게 회자되곤 한다. 홍명보는 당시 미국 월드컵에서의 환상적인 활약을 바탕으로 여러 해외클럽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나, 구단 포항의 반대와 K리그의 발전을 위해 포기했다고 한다.

그의 선수생활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단연 2002 한일 월드컵일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영원히 잊지 못할 한해다. 홍명보는 주장 완장을 달고 전 경기에 출전하며 한국을 4강으로 이끌었던 명실상부한 최고의 수비수였다. 8강 스페인전에서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골망을 흔든 후 표효했던 그의 세레머니는 아직도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월드컵이 끝난 후 2003년,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뒤로하고 그렇게 홍명보는 대표팀 동료였던 황선홍과 함께 모두의 박수 속에 선수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사진 = 런던 올림픽 동메달 획득 후 행가래 받는 홍명보. AP뉴시스


◆ ‘홍명보와 아이들’ 짧고 굵었던 감독 생활, ‘의리축구’ 비난도

홍명보는 은퇴 후에도 한국 축구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며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현역 시절 내내 주장완장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코치진으로 합류해 본격적인 현역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9년 꿈꿔왔던 감독의 길로 뛰어들었다.

홍명보는 감독으로 치렀던 첫 국제대회인 2009년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역대 최약체라고 평가받았던 팀을 8강으로 이끄는 지도력을 보여줬다.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역시 지휘봉을 잡게 된다. 홍명보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U-21 선수들로 연령대를 낮춘 뒤 이들을 계속 조련해 2년 뒤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 결실을 맺었다.

한국축구 사상 첫 동메달을 획득한 홍명보의 2012년 런던올림픽은 지금까지도 ‘런던 세대’라는 애칭이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덕분에 박주영과 기성용, 구자철과 김영권 등 주축 선수들은 병역 혜택까지 얻게 되어 남은 선수 커리어에 더욱 집중 할 수 있게 됐다.

이후 홍명보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지휘했던 성과를 바탕으로 2013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다. 당시 외국인 감독 선임에 대한 기대치로 곱지 않은 시선이 많았으나 브라질 월드컵까지 1년 밖에 남지지 않은 시점에서 축구협회는 홍명보라는 가장 현실적인 카드를 택했다.

하지만 홍명보호의 브라질 월드컵은 논란의 연속이었다. 유럽파를 중심으로 한 파벌과 특혜의식, SNS 설화와 항명 논란, 의리축구 등 수많은 구설수에 휩싸였다. ‘런던 세대’가 중심이 되었던 브라질 대회는 ‘의리축구’라는 비난 섞인 조롱을 견뎌야했다. 런던 올림픽의 동메달 멤버, ‘홍명보와 아이들’을 지나치게 신뢰했던 것이 독이 된 것이다. 특히 부진했던 박주영과 윤석영을 끝까지 기용하는 그의 독단적 모습은 국민들의 비판을 샀다. 결국 홍명보호는 브라질 월드컵에서 조별리그 1무 2패, 16강 진출 실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긴 채 귀국길에 올랐다.

홍명보는 브라질월드컵에서 대표팀의 일정이 모두 끝난 뒤 자진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여론의 압박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축구협회의 설득으로 2015 아시안컵까지 지휘봉을 잡기로 했으나, 국민들의 거센 사퇴 압박에 결국 자진사퇴로 방향을 바꿨다. 공식적으로는 자진사퇴였지만 사실상 경질이었다. 홍명보호는 1년 1개월 동안 총 19차례의 A매치에서 5승 4무 10패(승률 26.3%)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실패를 맛본 홍명보는 재기를 위해 중국 프로축구팀 항저우 그린타운을 택했다. 하지만 좋지 못한 성적 속에 2부 리그로 강등됐고, 2부 리그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홍명보는 팀의 부진을 책임지고 감독직을 내려놓게 된다. 박수 속에 떠났던 선수 은퇴식과 달리, 감독으로서 그의 마지막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 축구 협회로 다시 돌아오다… 행정가로 변신

2017년 11월 홍명보는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라는 직함과 함께 행정가로 일선에 돌아온다. 당시 홍명보는 “좋은 상황에서 시작하면 빛은 쉽게 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서 피해가는 것, 걱정 때문에 도망가는 것,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선택의 기준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다”는 말로 각오를 밝혔다. 하지만 축구협회에 대한 온 국민들의 질타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홍명보 역시 비난 여론을 피해가지 못했다.

홍명보는 특히 5일 기자간담회에서 지상파 방송 해설위원이자 2002 한일 월드컵 동료인 이영표 KBS 해설위원, 안정환 MBC 해설위원, 박지성 SBS 해설위원들을 언급하며 쓴소리를 했다. 이들은 해설 내내 축구협회의 시스템 문제를 지적하며 협회 개혁과 함께 유소년 선수 육성 시스템 등 축구환경 개선을 주장해왔다.

홍명보는 “1990년대 초반부터 월드컵을 경험한 나와 지금 해설위원들은 월드컵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다”면서 “2002년 월드컵의 성공은 1986년, 1990년, 1994년, 1998년에 증명하지 못했던 선배들의 힘이 모여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 세 명(이영표·안정환·박지성)은 한국축구에서 혜택을 받은 이들이다. 그래서 한국 축구의 어려움을 직접 경험했으면 좋겠다”며 “꼭 현장 경험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도자, 감독 등의 경험을 한 뒤 해설을 한다면 더 내용이 깊어질 것 같다. 훌륭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했으면 좋겠다. 문이 열려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에게 실질적인 지도 경험을 조언함으로써 해설가들의 쓴 소리에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표출한 것으로 풀이된다.

홍명보는 “어느 정도 환경이 토대 위에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고 행정가로서의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 이어 “지난 7개월 동안 많은 것과 부딪혔지만 축구협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걸 느꼈다. 축구협회뿐 아니라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송태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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