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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처세’의 사회학… 페미니즘 이전의 이야기

여성처세 서적 885종 분석해보니… ‘언니 독서’의 사회학


2000년대 여성처세 인기몰이… 2007년 출간 종수 ‘정점’
2016년 이후 젊은 여성들 페미니즘 서적에 큰 관심
年 5000∼6000권 머물던 판매량 올해 상반기 4만부 육박

지난달 23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는 독서의 고요함과 주말의 북적임이 뒤섞여 있었다. 서점 한편에는 ‘H 정치·사회·취업·수험서’라 쓰인 네모난 표지판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 아래 ‘H4-2 페미니즘’ 코너가 있었다.

H4-2 자리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통로 옆에 마련돼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페미니즘’ ‘백래시’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등의 책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지나치게 북적이지 않았지만 주기적으로 사람들이 들러 책을 훑어봤다.

그곳에서 출구방향으로 스무 걸음, 좌측으로 다섯 걸음, 다시 우측으로 다섯 걸음을 가면 ‘H 자기계발·경제·경영’ 표지판이 매달려 있다. 그 아래 ‘H7-6 라이프스타일/ 습관’ 코너가 있다.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면 (1)라이프스타일 (2)습관 (3)심리를 거쳐 (4)여성처세가 나온다. 남성처세는 없다.

다섯층으로 나뉜 책꽂이에 (4)여성처세는 맨 아래층을 차지했고 그 위층의 4분의 1 정도를 더 세 들어 살았다. 다리를 쭈그리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는 수시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여성처세가 있었다

처세란 ‘사람들과 사귀며 살아감. 또는 그런 일’을 뜻한다. 여성처세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특수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출간되는 책 대부분은 이미 남성 중심적이고 남성서사에 기반해 있다”며 “남성들은 이미 보편적 인간으로 상정돼 있으니 굳이 남성처세가 필요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대형 서점에는 남성처세 소분류가 없거나 있더라도 출간권수가 여성처세에 비해 훨씬 적다.

여성처세는 차별적 현실에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김경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처세 서적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흥미롭다”며 “성차별적 현실을 인정하고 장밋빛 환상이나 여성성에 대한 과도한 미화에 기대지 않으면서 성공이나 목표에 어떻게든 도달하자는 메시지가 많다”고 말했다.

국민일보는 교보문고의 웹사이트에 등록된 여성처세 서적 885권을 1983년부터 올해까지 출간연도별로 정리해 살펴봤다. 여성처세 서적은 크게 ‘여성처세’와 ‘여성을 위한 조언’으로 나뉘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전자는 실행 위주이고 후자는 덕목 등에 대한 조언”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오래된 여성처세 서적은 1983년에 출간된 ‘사랑받는 직장여성’이다. 이후 뜸하던 여성처세 서적은 2000년대 들어 점차 늘어나면서 2007년에 105종으로 정점을 찍었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000년대 중후반이 여성처세 서적의 전성기였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여성 관련 이슈가 활발히 논의되고 관련 법제도가 많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됐고 보육업무가 보건복지부에서 여성부로 이관됐다. 2005년에는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개편되고 호주제가 폐지됐다. 2007년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이 일가정남녀고용평등법 등으로 합쳐졌다. 2008년에는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촉진법이 제정됐다. 대학가에선 총여학생회나 여학생휴게실이 역차별을 조장하므로 없애야 한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에 따른 경기 침체가 여성처세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관련 서적이 많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증가 추세를 보였다. 이런 경향은 2008년을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여성도 일하고 독립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전파됐다는 것이다.

여성처세 서적 885권의 제목으로 워드클라우드(word cloud·글에서 언급된 핵심 단어를 시각화하는 기법)를 한 결과 ‘성공’ ‘리더십’ ‘일하는’ 등 단어가 눈에 띄었다(여성처세 서적 특성상 ‘여성’ ‘여자’ 등 단어가 많아 이는 제외했다). 김 교수는 “경제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맞벌이 부부가 대세가 되고 여성도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회적 규범이 됐다”며 “여성도 일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뚜렷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교보문고 웹사이트에 1983년부터 2018년 7월 7일까지 등록된 여성처세 서적 885권의 제목으로 만든 워드 클라우드. 글자 크기가 클수록 많이 언급된 단어다. ‘성공’ ‘일’ 등이 많이 언급됐고 ‘엄마’ ‘아내’ 등 가족과 관련된 단어도 많았다. 권중혁 기자

2016년 변화의 시작

여성처세 서적은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활동범위를 넓게 본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여전히 기존의 성차별적 구조 내에서 이뤄진다는 한계가 있다. 워드클라우드를 보면 ‘엄마’ ‘아내’ ‘어머니’ 등 가부장제하에서의 여성을 호명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이 눈에 띄었다.

김 교수는 “다수의 여성처세 서적은 독박육아, 부부간 문제, 여성문제 등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세를 통해 위기를 잘 넘긴 뒤 일도 찾고 인생을 계획적으로 살라는 메시지가 강한 경향이 있다”며 “현재의 문제를 여성만이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회사원 길모(27)씨는 “여성처세 서적은 여성이 사회에서 뭔가를 이루지 못할 때 이를 여성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다”며 “몇몇 책은 여성이 명품과 겉모습 꾸미는 것만 좋아하는 속물적인 존재로 보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했다.

2016년 이후부터는 페미니즘 서적이 많아지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페미니즘 관련서가 속한 여성학 분야의 출간 종수는 2016년 이전 해마다 평균 30종이었지만 2017년에는 78종이 출간됐다. 판매량도 2.1배 증가했다.

책 판매량도 훌쩍 뛰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페미니즘 서적은 매년 5000∼6000권이 판매됐지만 2016년 이후 판매량이 급등했다”고 말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페미니즘 서적의 2016년 판매권수는 1만59권, 2017년 2만8241권, 2018년 7월 2일 현재 3만9785권이다. 이는 ‘82년생 김지영’ 등 페미니즘 서적으로 분류되는 소설은 제외한 수치다. 같은 기간 여성처세 서적은 1만508권, 7881권, 2만3723권이 판매됐다.

김 교수는 “페미니즘은 차별적 구조를 깨려는 시도다. 남성과 여성의 구조적 관계가 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김 교수는 “2000년대 중후반 당시엔 알파걸이 많이 언급됐다”며 “많은 여성이 대학을 갔지만 현실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연봉이 높아도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에 전적으로 매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문제이자 친구의 문제”

지난 7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에서는 ‘불법촬영(몰카) 범죄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열렸다. 같은 시각 고교 3학년 윤모(18)양은 교보문고 H4-2 코너에서 ‘학교에서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는 “남학생이 많은 학교에 다니는데 듣기 거북한 말이 들릴 때가 많다”며 “뭐라 하고 싶어도 보복을 당할까 가만히 있는다”고 말했다.

윤양은 혜화역 시위에 잠깐 들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나라에서 여성으로 살면 (성차별적 현실은) 저의 문제이고 친구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그걸 외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날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6만여명(경찰 추산 1만8000여명)이 모였다. 그간 여성 인권을 의제로 열린 역대 집회 중 가장 많은 수치였다. 하지만 이틀 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여성들이 행동거지라든지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행동거지도 여성처세였을까.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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