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전 총리가 지난 10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고등법원에 걸어들어가고 있다. 나집 전 총리는 임기 중에도 국영투자기업에서 수조원의 나랏돈을 빼돌린 혐의를 받았지만 '가짜뉴스'라고 일축했다. AP뉴시스


말레이시아 의회가 16일(현지시간) 정부가 허위 뉴스를 작성하거나 유포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세계 최초의 ‘가짜뉴스 처벌법’을 폐지하기로 했다. 가짜뉴스 처벌법이 언론을 탄압하고 비판을 가로막는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점을 고려한 폐지 조치다.

인권 및 자유언론 시민단체는 즉각 이를 반겼다. 인권을 위한 동남아국가연합 의원들(APHR) 소속의 테디 브라우너 바굴리아트 필리핀 국회의원은 “정부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고 대중의 논쟁을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었다”며 “이 법은 애초에 통과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짜뉴스 처벌법은 나집 라작(사진)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집권하던 지난 4월 제정됐다. 총선을 한 달 앞둔 민감한 시점이었다. 법에 따르면 가짜뉴스를 유포하거나 작성할 경우 6년 징역형 또는 50만 링깃(약 1억35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문제는 가짜뉴스를 가려내는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었다. 나집 전 총리는 2015년 국영투자기업 ‘1MDB’에서 수조 원의 나랏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에 휘말려 있었다. 그러나 당시 말레이시아 정부 고위 관계자는 “1MDB와 관련해 정부가 확인해주지 않은 어떤 뉴스도 가짜뉴스”라고 밝혔다. 언론에 ‘멋대로 추측하지 말라’는 엄포를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말레이시아 시민들은 사소한 잘못으로도 기소됐다. 덴마크 국적의 살라 살렘 살레 술레이만(46)은 지난 4월말 올린 유튜브 동영상에서 말레이시아 경찰이 총기 사고를 신고 받고도 대응에 50분이나 걸렸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실제 대응까지 걸린 시간은 8분에 불과했다며 술레이만을 기소했다.

당시 야권연합 총리후보였던 마하티르 모하마드 희망연대(PH) 후보도 가짜뉴스법의 표적이 됐다. 마하티르는 지난 4월말 누군가 자신의 전세기에 의도적으로 결함을 발생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쿠알라룸푸르 경찰이 그를 가짜뉴스 유포 혐의로 조사했다.

나집 전 총리는 지난달 말레이시아 국부 펀드 1MDB로부터 거액을 불법으로 받아내고 3건의 돈세탁에 연루된 혐의로 지난달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다. 나집 전 총리가 가짜뉴스라고 일축했던 혐의들이 하나씩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언론의 비판을 받는 ‘스트롱맨’일수록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가짜뉴스로 몰아세우며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짙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언론과 사이가 나쁜 대표적 지도자다. 트럼프 대통령은 틈만 나면 ‘가짜뉴스 언론은 국민의 적’이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미국의 350개 언론이 ‘언론은 국민의 적이 아니다’라고 공동 사설을 게재했으나, 꿋꿋이 언론을 가짜뉴스라고 비판하고 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역시 자신을 향한 비판을 가짜뉴스라고 몰아붙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말레이시아가 가짜뉴스 처벌법을 철회하면서 가짜뉴스 관련법을 제정했거나 제정을 고려 중인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줄 것인지 주목된다. 최근 싱가포르와 필리핀 등이 가짜뉴스 처벌법 제정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독재자라로 비판받고 있는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지난달 “가짜뉴스를 단속하겠다”며 팔로워가 5000명이 넘는 SNS 계정을 언론으로 간주하고 이를 감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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