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씨. JTBC 화면 캡처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되뇌며 살았습니다. 스스로에게 잔인한 말 ‘괜찮아’로 저의 아픔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김지은씨가 1심 판결 후 한달여만에 심경을 밝혔다. 민주노총이 발행하는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 보낸 기고문을 통해서다. 안 전 지사는 지난달 14일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재판장 조경구)가 진행한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위력은 존재했지만 이를 행사했다는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판결했다.

김씨는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는 제목의 기고문에 “(예전엔) 노동자였고, 지금은 안희정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 “불편하실지 모르지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라며 글을 시작했다.

‘계약직 근로자’의 불안정한 삶

김씨는 기고문에서 안 전 지사의 ‘위력’이 계약직 공무원을 전전한 자신에게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담담하게 전했다. 10개월 단기간 행정인턴으로 일을 시작한 김씨는 늘 고용 불안에 시달렸다. 계약직은 근무 기간이 끝나면 좋은 평가를 받아야 계약이 연장될 수 있다. 김씨는 “계약 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 밖에 모른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적었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대학원을 졸업했다. 기간제 근로자, 연구직을 거쳐 계약직 공무원이 됐고 공공기관에서 6년간 일했다. 집에는 빚이 있었고, 아픈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실질적인 가장이었기에 김씨에게 ‘일’은 늘 절실한 문제였다.


안희정 선거 캠프에 들어간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김씨는 이곳에서도 ‘성과’와 ‘평판’을 신경 쓰며 살아야 했다. 선배들에게서 그가 수없이 들은 이야기는 “정치권에 온 이상 한 번 눈 밖에 나면 다시는 어느 직장도 쉽게 잡지 못 한다”는 말이었다. 이 때문에 김씨는 성폭행 피해를 당하고도 괜찮은 척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가 쓴 이 글에는 성폭행 피해를 당하지 않았더라도 계약직 근로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냈던 김씨의 고민과 갈등은 평범한 20~30대 직장인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갖는 마음과 닮았다.

‘피해자다움’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환경

4차례 성폭행을 당한 뒤에도 김씨가 안 전 지사를 대한 태도는 평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김씨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기대되는 위축이나 불안, 격정적인 감정 등을 외부에 드러내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김씨의 꿋꿋한 태도는 안 전 지사의 성폭력 혐의에 대한 무죄 판결의 근거가 됐다.

여성 단체들은 성폭력 피해자라면 응당 절망하고, 격렬하게 괴로워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처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선입견에 의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실체가 불분명한 ‘피해자다움’을 법적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논리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피해자 김씨는 ‘피해자 답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김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건 내 평판만 깎아먹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지사 험담을 하면 혹여나 일에서 잘릴까 주변에 좋은 이야기들만 했다”고 했다. 안 전 지사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한다면 직장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직장도 잡기 힘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던 것이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비참하고 참담했다”

하지만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폭행 피해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김씨 또한 그랬다. 김씨는 “비참하고 참담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주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수차례 이야기했었다.

김씨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눈 밖에 벗어나지 않도록, 더 일에 집중하는 것 뿐이었다”고 적었다. ‘피해를 호소하고 법적 처벌을 구하는 것’ 대신 ‘피해를 잊기 위한 노력’을 하기로 한 것이다.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려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과 불신, 자신에게 덮쳐올 또 다른 피해, 직장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직장도 구하지 못 하 것이라는 두려움 등이 김씨에게 이런 결정을 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김씨의 꿋꿋함은 사실 사회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대체로 권장되는 태도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 것, 그래서 구설에 오르지 않는 것, 개인적인 어려움을 회사로 끌어들이지 않는 등의 ‘쿨한’ 태도는 20~30대 젊은 여성 직장인들에게 특히 요구된다.


‘힘든 내색 없었다’고 피해자가 아니라는 법원

김씨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계속 일을 해 왔던 그의 노력이 오히려 재판에서 악용됐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재판 중에 노동자로서 성실히 일했던 제 인생은 모두 가해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좋은 근거로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렇게 수년간의 제 노력은 일반적인 노동자의 삶으로 인정받기 이전에 ‘피해자다움’과 배치되는 인생으로 평가받았다”고 했다.

김씨는 “(피해자답기 위해) 업무를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야 했나”라며 “하루하루의 업무가 절실했던 제가 당장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었겠나”고 되물었다. 이는 김씨가 즉각 피해를 호소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이해할 수 없다며 김씨를 비난하는 일부 여론에 대한 반박이기도 하다.

1심 재판부는 업무상 수직적, 권력적 관계로 인하여 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지위 직책 영향력 등 안 전 지사에게 위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김씨에게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이에 대해 김씨는 “위력의 존재와 행사는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위력이 존재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위력은 행사가 된다는 것이다.

‘위력’은 피해자가 거부하기 힘든 힘

김문환 전 에티오피아 주재 한국대사는 지난 12일 안 전 지사와 마찬가지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비슷한 사안에 상황 또한 비슷했으나 정반대의 판결이 나오면서 ‘피해자다움’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됐다.


김문환 1심 재판부의 판단은 이렇다. “간음 행위 이전 두 차례 신체 접촉이 있을 때 피해자가 소극적인 행동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을 뿐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평소 피고인의 지위와 피해자와의 관계 등에 비춰보면 성추행을 지적하며 단호하게 항의하기 어려웠다는 피해자의 진술은 수긍이 간다.”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위력이 피해자를 ‘얼어 붙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감안한 것이다.

김씨도 기고문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김씨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특별한 게 아니다”라며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 위력은 눈에 보이는 폭행과 협박 뿐 아니다”라고 했다. 침묵과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것, 직장에서 술을 강요당하고 달갑지 않은 농담을 듣는 것, 회식 자리에서의 추행 등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겪는 위력의 문제’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테다.

이 기고문은 ‘노동과세계’가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통해 요청했고 김씨가 이에 응해 게재가 이뤄지게 됐다. 김씨의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다시 노동자가 되고 싶습니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고,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동료들과 일하고 싶습니다…어쩌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언젠가 꼭 다시 불리고 싶습니다. 노동자 김지은이고 싶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되찾고 싶은 소망이 담긴 끝맺음이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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