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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옷 입고 와서 여기 한 번 걸어 봐요.” 지난해 서울의 한 백화점 매장에 면접을 보러 간 백모(23)씨에게 면접관이 ‘44 사이즈’ 매장 유니폼을 주며 한 말이다.

지난해 취업준비생이었던 백씨는 서비스직이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해 백화점 매장 직원 채용 공고가 뜨는 대로 지원서를 넣었다. 한 남성복 매장에서 연락이 와 면접을 보러 가자 직원은 지원자들에게 매장 유니폼을 주며 입게 했다. 백씨는 “면접관이 ‘여자 직원이 마르고 예뻐야 남자 고객들이 옷을 사지 않겠냐’고 하더라”며 “면접관이 내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을 좀 빼야겠다’고 하는데 너무 수치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어 “알고 보니 현장 서비스업에선 이런 면접이 일반적이었다. 이후엔 면접을 보기 전 3∼5일은 저녁을 굶으며 단기 다이어트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서비스직에 환멸을 느껴 지금은 온라인 상담 업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부산에 사는 김모(29)씨는 지난해 서울의 한 아시아인 인권보호NGO에서 봤던 면접을 잊을 수가 없다. 행정업무 간사직에 지원했던 김씨는 1대 1 면접 자리에서 ‘현재 연애를 하냐’는 질문을 들었다. 김씨가 “안 한다”고 답하자 면접관은 “왜 안 하냐” “비혼주의냐”는 등 질문을 쏟아냈다. 김씨는 “사적인 질문에 불쾌했지만 ‘그냥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자 면접관이 ‘여자는 연애를 해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믿고 같이 일할 수 있겠냐’고 쏘아붙이더라”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엔 당황한 것을 티내지 않고 말을 잘 돌렸지만 생각할수록 ‘내가 여자여서 그런 소리를 들었구나’하는 생각에 억울하다. 인권을 위한다는 단체가 지원자에게 성차별적 소리를 하다니 위선적이다”라고 덧붙였다.

면접 자리에서 나오는 성차별적인 발언이 여성 취업준비생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면접관이 업무 관련 능력과 상관없는 결·출·남(결혼, 출산계획, 남자친구 여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만연하다. ‘여성스러움’과 ‘상냥함’을 강요하기도 한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단체들이 모여 만든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은 지난 8월 27일부터 9월 10일까지 채용 성차별 제보를 받은 후 22개 사례를 26일 공개했다. 국민일보는 이 중 사례자 6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성차별적 질문의 답변까지 준비하는 여성 취준생들

사례자들은 면접관들이 ‘결혼한 여성’에 대한 갖가지 편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 사는 전모(29)씨는 2014년 사내 민주적인 분위기를 지향한다는 한 사회적기업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관 2명은 전씨와 또 다른 여성 지원자에게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하면 일을 그만둬서 여자를 뽑기 꺼려진다. 다들 결혼하면 그만둘 거냐’고 물었다. 전씨는 “당시 비혼에 대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당황해 ‘나는 비혼주의자다’라고 답했다. 비혼 여부를 떠나 ‘그런 질문은 면접 자리에서 부적절하다’고 당당히 맞설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씨는 “한 면접장에선 ‘결혼·출산에 대한 생각이 없는 책임감 없는 여성에게 어떻게 일을 맡기냐’고 하고 다른 곳에선 ‘여자들은 결혼하면 일을 그만둔다’고 지적한다”며 “그들의 성차별적 스테레오타입 사이에서 나 같은 여성 취준생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다. 화를 내면서도 상황에 맞는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여성’이 일을 잘 못한다는 편견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면접관들도 있었다. 서울에 사는 하모(26)씨는 2014년 주방조리사로 지원한 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면접장에서 “여자들은 끈기가 없고 적응을 잘 못해서 쓰기 싫던데, 오래 근무할 수 있냐”는 질문을 들었다. 하씨는 “설사 이전에 근무했던 여자 직원들이 빨리 그만뒀다고 해도 그건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 아니냐”며 “괜한 오기가 생겨서 그곳에서 다른 남자 직원들보다 더 길게 일했다”고 말했다.

구미에 사는 A씨는 지난해 한 금속 제조업체에 지원했다가 면접장에서 이전 직장의 연봉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A씨가 연봉을 말하자 당시 해당 업체의 임원이었던 면접관은 “여자인 거 치고는 많이 받았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A씨는 “내 노동 가치가 폄하당하는 것 같아 ‘성별이 무슨 상관입니까. 일한 만큼 받은 거죠’라고 답했다”며 “여성의 구조적인 저임금 문제가 여성 능력이 낮아서 생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면접장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나 상당히 불쾌했다”고 말했다.

‘여성스러움’이나 ‘상냥함’을 여성 지원자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대구에 사는 B씨는 2014년 한 일반기업의 인사팀 직원을 뽑는 자리에서 ‘여자가 인상이 무뚝뚝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B씨는 “면접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면접관이 ‘여자가 무뚝뚝하면 사회생활이 힘들다고 더 상냥하게 행동하고 웃어야겠다’며 집에서 부모님에게 애교가 없는 편이냐고 물었다”며 “당시엔 내가 어렸을 때라 성차별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냥 웃어 넘겼는데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이러려고 죽어라 공부했나’ 억울해”

사례자들은 성차별적인 면접을 겪은 이후의 후유증을 토로했다. 백씨는 “백화점 매장에서 하루 종일 서 있는 직원들을 뽑으려면 몸이 튼튼한지를 보는 게 정상 아니냐”며 “마르고 예쁜 직원을 뽑는 건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이 반영된 거다. 이런 생각에 취직한 이후에도 매장에서 근무하는 게 불편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높은 지금도 여전히 ‘여성이면 출산을 해야 한다’ ‘여성은 결혼하면 일을 그만둔다’는 등 편견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이러려고 죽어라 공부했나,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왜 내 능력을 키웠나’ 싶어 억울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해당 사례들이 여성 취준생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현실이라고 분석한다. 실제로 지난 3월 취업 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여성 구직자 5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구직활동을 하면서 여성으로서 불이익을 받았던 적이 있었는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2%가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고 밝혔다.

김명숙 한국여성노동자회 노동정책국장은 “이미 80년대에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에 기업이 모집과 채용에서 성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 데도 채용 성차별 문제는 여전하다”며 “여성 단체들이 고용노동부에 적극적인 관리 감독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데도 정부가 소극적으로 나서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강민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노동연구센터장은 “결혼·출산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여성들이 많은 건 육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구조 때문인데 여성 취준생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결국 국가가 육아를 책임져주지 않으면 성차별적 채용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은 면접 시 피해야 할 질문 등을 정리해 기업들에 ‘기업 채용 실천 가이드’ 공문을 보낼 예정이다. 해당 가이드는 면접 질문을 직무 중심으로 구성하고 연애, 결혼, 출산 계획에 대해 일절 묻지 말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지원 자격에 직무와 관련 없는 성별, 나이, 신체조건의 제한을 두지 않고 지원 단계별 지원자 및 합격자의 성비를 공개할 것을 포함한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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