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석희가 2015~2016시즌 ISU 월드컵 1차 대회 여자 1500m 결승에서 2분25초260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해 금메달을 차지했다. 뉴시스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간판’ 심석희(22·한국체대)는 늘 어두운 모습이었다.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최고의 순간에도 동료인 최민정(21·성남시청)은 뛸 듯이 기뻐했지만 심석희는 약간의 미소만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모습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로 포장됐다. 심석희는 지난해 5월 팬미팅에서 팬들의 응원 동영상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는 다들 힘든 선수생활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심석희의 무표정과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을 듯하다. 항상 함께 지내던 코치로부터 갖은 폭력에 시달린 것은 물론 ‘성폭행’이라는 여성으로서 엄청난 수치심과 괴로움을 혼자 속으로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터다.

해당 코치가 부인하고 있지만 심석희의 고소장에 나타난 상황만 살펴봐도 참담하다. 앳된 여고 2학년, 17세 때부터 몹쓸 짓을 당했다. 장소도 학교 빙상장 지도자 라커룸, 태릉 및 진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 다양했다. 범행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는 협박과 함께 무차별적인 폭행에 시달렸다. 그러나 아픔을 세상에 알릴 수도 없었다. 금메달 제일주의와 엄격한 위계질서가 판치는 스포츠계에서 자신의 성적을 좌우하는 코칭스태프의 뜻을 어린 학생이 거스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조재범 전 빙상 국가대표 코치의 심석희 선수 상습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정부 대책을 발표한 뒤 고개 숙여 사죄하고 있다. 정부는 성폭력에 연루돼 징계받은 체육인은 국내외 체육 관련 단체에 종사할 수 없도록 영구 제명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최현규 기자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심석희 성폭행 파문이 불거지자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했다. 노태강 문체부 제2차관은 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체육계 성폭행 비위 근절을 위한 대책’을 밝혔다. 우선 체육계 성폭행 관련 징계자가 국내외 체육 관련 단체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다. 인권 전문가와 체육단체가 참여하는 ‘체육 분야 규정 개선 TF’를 구성하는 방안도 마련키로 했다. 성폭력 등 비위 근절을 위한 체육단체 전수조사 실시, 체육 분야 비리 대응 전담기구인 ‘스포츠윤리센터’(가칭) 설치도 추진키로 했다.

하지만 이런 대책은 미봉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성적 지상주의와 주종관계로 변한 사제 관계,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 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제2의 심석희는 언제든 생길 수 있어서다. 실제 ‘젊은빙상인연대’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심석희 말고 빙상계 실세들에게 성폭행, 성추행 등에 시달린 선수들이 더 있다”고 폭로했다. 연대는 “성폭력 피해 선수들과 함께 진실을 이야기하겠다”며 기자회견 및 가해자 고발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박아름 활동가는 “스포츠계는 지도자가 선수를 훈련시키고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쳐 위력이 더 크다”며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했을 때는 판 자체를 떠나야 한다는 공포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정용철 교육대학원 교수는 “스포츠계에서 계속 성폭행 문제가 불거지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선수와 지도자 간 강압적 관계, 코치가 선수의 미래를 좌우하는 권력 구조, 솜방망이 처벌 등 만연한 잘못된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규엽 조효석 기자 hirt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