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서울 서초동 중앙지방검찰청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전직 대법원장이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기는 헌정 사상 처음이다. 윤성호 기자 cybercoc@kmib.co.kr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며 “평생을 법원에서 근무한 사람으로서 (사법농단 의혹) 수사 과정에서 법원을 한번 들렀다 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검찰 소환조사 직전이었다. ‘검찰 포토라인’ 대신 대법원 앞을 택한 것이다. 법원 노조는 회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보수·진보 단체의 충돌을 우려해 1400여명의 경찰 병력이 동원됐다. 예견 가능했던 혼란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임기 ‘사법부의 왕’으로 불렸다. 양 전 대법원장이 등산을 좋아해 자주 개최된 법원 등산대회에서는 “‘승’승장구 기세, ‘태’산도 두렵지 않다”는 등의 ‘삼행시’ 플래카드가 걸렸다. 양 전 대법원장은 주변 판사들에게 “소명을 갖고 일하지 않을 거면 다 나가라”는 말도 자주 했다고 한다. 대법원 회견 당일 혼란을 보며 “양 전 대법원장이 제왕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는 말들이 나왔다. 한 변호사는 “회견을 보고 있자니 사법농단이 왜 벌어졌는지 이해된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의 지난 18일 구속영장 청구로 구속 기로에 서 있다. 2011년 고심 끝에 대법원장직을 수락했을 때만 해도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애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제안을 고사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국립공원 인근의 존 뮤어 트레일을 걷던 중 사돈인 김승규 전 국가정보원장의 전화를 받고 마음을 돌렸다. 양 전 대법원장은 당시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인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취임사에서는 “재판 독립 없이는 법원이 결코 사명을 완수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면서 “법관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함에 있어 어떤 형식의 부당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모든 역량을 다 바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법원장이 되자 ‘로완 중위’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앤드루 로완 중위는 19세기 말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던 미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쿠바 반군 지도자에게 대통령의 편지를 전달한 인물이다. 소재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열악한 상황에서 임무를 완수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3년 1월 사법원수원 수료식에서 “로완 중위가 주목받는 것은 맡은 임무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능동적·창의적으로 임무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라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책을 찾아 즉각 실행에 옮겼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일화를 출력해 법원행정처 직원들에게도 나눠주었다고 한다. 당시 행정처에서 근무했던 한 판사는 “아랫사람들 입장에서는 사실 부담되는, 힘든 주문이었다”고 토로했다.

법조계에서는 ‘로완 중위’ 일화가 사법농단 의혹 사건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시각이 많다.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임무를 성사시키기 위해 청와대·국회와 재판을 놓고 거래까지 검토했다는 점 때문이다. 상고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의 숙원 사업이었다. 서기호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으로부터 임무를 받아든 ‘양승태의 로완 중위’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실장, 이민걸 전 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이라고 말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로완 중위 그 자체”라고도 했다.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는 당시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 결과에 개입하려는 박근혜정부의 의도를 2013년 하반기 파악했다. 정부는 일본 전범 기업에 배상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대법원이 내주길 원했다. 이를 위해 양 전 대법원장은 해당 재판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해야 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정부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상고법원 등 각종 현안 처리 과정에서 도움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차한성·박병대 전 행정처장은 2013년과 2014년 각각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에 불려가 징용 소송 계획을 논의했다. 그들은 논의 결과를 양 전 대법원장에게 보고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전범 기업을 변호하고 있던 법무법인 김앤장 소속 한상호 변호사와 직접 대법원장 사무실에서 회동했다. 그는 정부, 미쓰비시 등 전범 기업 바람대로 소송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5~2016년 피고 측 대리인에 불과한 한 변호사와 모두 합쳐 세 차례나 만났다. 통화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검찰은 김앤장을 압수수색해 이들의 회동 결과를 정리한 문건을 확보했다. 이민걸 전 실장으로부터 ‘2016년 9월 말 외교부 측에 징용 소송의 전합 회부 계획을 알린 것은 양 전 대법원장의 지시였다’는 취지의 진술도 확보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 지위확인 소송에 개입하라는 지시를 직접 내리기도 했다. ‘대법원 위상 강화’라는 임무 하에 헌재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관련 소송이 행정처의 지침과 다르게 결론나자 이규진 전 실장에게 “어떻게 이런 판결이 있을 수 있느냐. 행정처 입장이 재판부에 제대로 전달된 것이 맞느냐”고 질책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 내 특정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국제인권법연구회 문제는 내 임기 중에 정리를 하겠다” “어떻게든 ‘인사모(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변에 자주 언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인권법연구회, 인사모는 자발적으로 구성된 법원 내 법관 모임이다. 인사모는 2015년 8월 ‘상고법원 끝장 토론회’를 개최해 상고법원 반대 의견을 발표한 적이 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으로 전망한다. 범죄의 중대성 및 수집한 인적·물적 증거를 모두 고려한 판단이다. ‘주범’이라는 인식도 강하다. 검찰 관계자는 “상황을 주도하고 행동한 것이 수사에서 확인됐다”고 말했다. 이는 법원을 겨냥한 말이다. 법원은 지난달 박병대·고영한 전 행정처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이들을 임 전 차장의 단순 ‘공모자’로 판단했다. 당시 법원은 “임 전 차장과 공모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한 판사는 “증거 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이 기각될 수도 있다”며 “이 경우 후폭풍이 거셀 것이어서 부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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