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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훈 칼럼] 당연하지만 너무 중요한 질문 세 가지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선생님께 받았던 질문 중에 ‘성경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과 같은 식의 극단적인 질문을 제일 싫어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어떻게 딱 한 단어나 문장으로 정리가 될 수 있나요?”라고 되묻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부류의 질문은 때론 어떤 중요한 개념을 좀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기억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는 너무 당연해서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쉽게 생략해버리는 중요한 질문 세 가지를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예배란 무엇일까?”입니다.

사실 예배의 기본적인 의미나 마음가짐, 태도에 대해 설명하는 글은 인터넷상에 이미 넘쳐날 정도로 많습니다. 그래서 굳이 이 글에서 예배에 대해 광범위하고 심오한 학술적인 의미를 다룬다거나 혹은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롭고 특별한 내용을 지어내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존에 알려진 예배사역과 관련된 개념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통합하는 작업을 한 후에 예배사역에 필요한 기본 개념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금은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지만, 그래도 꼭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예배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서 짧게 다루고자 합니다.

예배는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로 ‘아보다(Avodah)’ 입니다. 이 단어는 ‘일한다.’ 또는 ‘섬긴다.’를 뜻합니다(사무엘하 15장 8절 참고). 이 낱말은 원래 예배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본질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담아내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행위로서 하나님께 봉사하고 섬긴다는 의미로만 주로 쓰이게 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예배와 삶이 점차 분리되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에 이르러서는 영적인 예배와 대립된 형식적인 예배의식을 뜻할 때에만 쓰이게 됩니다.

구약의 ‘아보다’와 같은 의미의 단어로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그 뜻은 ‘임금을 받는 고용’, 혹은 ‘매매되는 노예’를 의미하는데요.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특별히 외적인 예배 행위와 내적인 본질을 따로 분리시키기보다는 원래 구약의 ‘아보다’처럼 행위와 본질이 함께 포함된 의미로 사용됩니다. 영어로는 Service로 번역되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의 의미와 가장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도 합니다(로마서 12장 1절 참고).

여기에 추가로 ‘프로스큐네오’(προσκυνέω) 라는 낱말이 등장하는데, 무엇을 향해 ‘엎드리다’, ‘경배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요한복음 4:20이하 참고). 예배의 본질적인 가치를 설명할 때 특별히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의 의미로 Worth + Ship의 합성어, 즉 예배의 대상의 가치에 맞는 합당한 것을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위의 내용을 토대로 예배의 개념을 요약,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예배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의식을 뜻하는 동시에, 예배의 외적인 행위가 내적인 예배의 본질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밀착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공적인 예배의식 속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에 맞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우리의 삶 자체를 말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배사역이란 무엇일까?”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현대적인 스타일의 음악으로 예배를 섬기는 사역을 보통 일반적으로 ‘예배사역’ 혹은 ‘워십 사역’으로 지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배사역이라는 단어는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지만, 꽤 긴 시간 동안 교회 안에서 예배사역이라는 의미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역 현장에서 ‘고유명사’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큰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 그렇게 계속해서 쓰일 것 같습니다.

분명 예배사역은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커다란 유익을 주었고, 지금도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배사역은 기존의 전통적인 예배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를 위한 선교적인 역할까지 훌륭하게 잘 감당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예배사역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예배사역이라는 개념을 현대적인 스타일의 예배음악 사역자들이 주로 사용하다 보니, 음악이 아닌 다른 파트의 예배사역자들(성가대, 영상, 음향, 헌금, 안내 등)의 경우 자신의 사역에 대한 개념의 혼선이 부득이하게 오기 쉽습니다. 분명 의도된 상황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스타일의 예배음악 사역이 ‘예배사역’이라는 공통의 일반명사를 홀로 독점해버리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또 하나 우려가 되는 것은 그렇게 현대적인 스타일의 예배음악 사역자들이 예배사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예배사역들보다 너무 지나친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때 자칫 그들 스스로가 교회의 부흥을 주도해야 한다는 영웅주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의 사역 현장 속에서 자주 발생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예배사역이 한국교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전국적으로 수많은 찬양팀들이 교회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어떤 장로님들은 차를 팔아서 헌금을 하기도 했고, 또 어떤 교회는 특별헌금을 작정해서 음향 기기와 악기들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세계를 경험한 찬양사역 지망생들이 각 교회마다 새롭게 생겨났고(필자도 그들 중에 하나입니다), 심지어 유명 인도자들이 했던 멘트와 행동까지 똑같이 따라 하면서 찬양을 인도하는 기현상까지 생기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90년 초반에 ‘오늘 이 밤에’라는 멘트가 사이에서 유행했었는데, 어떤 인도자는 날이 훤한 대낮에 ‘오늘 이 밤에’라고 말했다가 머쓱해하면서 다시 ‘오늘 이 낮에’로 멘트를 정정하는 웃지 못할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모든 기존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기존의 질서를 바꾸는 ‘변화’인 것처럼 간혹 찬양 인도 중에 멘트를 한다거나, 담임목사님의 설교 전에 찬양인도자가 담임목사님과 전혀 다른 교회의 방향을 주장하는 모습까지, 예배사역의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곳곳에서 많이 생겨났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예배사역이라는 이름을 예배와 관련된 교회 구성원 모두의 것으로 다시 되돌려 드리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 내에서 음악 사역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들이 등장해왔습니다. 그중에서 현대적인 스타일의 예배음악 용어의 사용과 관련된 대표적인 주장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에서 부르는 음악 중에 예배 때 주로 쓰이는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 음악을 ‘예배음악’으로 부르고, 그 외에 교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신앙 고백을 담거나 서로를 향해 축복하고 나누는 음악을 ‘교회음악’으로 구분하여 부르자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80년대 중, 후반부에 미국으로부터 도입되어 현재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과, 그것과 구별된 의미로 예배 때 주로 사용되는 음악을 뜻하는 ‘CWM(Contemporary Worship Music)’으로 구분하여 부르자는 주장입니다.

그 외에도 예배사역과 관련된 용어의 사용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사실 이런 다양한 의견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교단을 초월한 모든 교회들이 따로 소통 협의체를 구성해서 일괄적으로 하나의 공용어를 사용하기로 채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시면 됩니다.

미국의 신학자 존 F. 프레임의 말처럼 어쩌면 신약성경에 초대교회 예배 형식에 대한 정확한 매뉴얼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이유는 교회들이 예배의 본질이 아닌 형식에 있어 각자의 상황에 맞게 자유로운 형식으로 예배하라는 하나님의 의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 다른 예배적인 상황에 놓인 독자들이 자신의 공동체적 맥락에 가장 잘 맞는 용어를 선택하여 풍성한 은혜를 누리도록 돕는 것이 어쩌면 용어의 형식적인 통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혹시 저에게 개인적인 의견을 물으신다면(이 글에서 계속 사용할 하나의 용어를 선택해야 하기에), 저는 위의 대표적인 두 가지 용어 구분을 적절히 고려해서 ‘예배음악 사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음악의 탈 장르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장르에 대한 형식적인 구분이 거의 사라지고 클래식과 대중음악이 서로 간의 장르를 넘나드는 상황이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이 두 가지의 음악 장르가 교회 안에서 강하게 대립한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어느 정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공존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런 두 가지 음악 형식을 섞은 예배를 ‘Blended worship’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음악 사역이라는 용어를 현대적인 스타일의 예배음악을 가리키는 데 사용할 때, 굳이 그 앞에 ‘현대’라는 단어를 덧붙이지 않아도 전통적인 스타일의 성가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정체성을 현대적인 스타일의 예배음악이 침범하거나 위협하는 의도로 인식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위에서 등장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주장 속에 등장하는 ‘CWM’이라는 외래어와 ‘예배음악’이라는 두 용어는 적절한 교차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두 단어 중에 외래어보다는 우리말로 된 용어를 먼저 사용하는 것이 또한 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앞으로 기존의 ‘예배사역’라는 용어는 음악 이외의 다양한 예배사역까지 포괄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하고, 현대적인 스타일의 예배음악을 지칭할 때에는 ‘예배음악 사역’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정리해보면, 예배음악 사역을 무대(강단) 앞에서 이끄는 사람을 우리는 보통 ‘워십리더’, ‘찬양인도자’, ‘예배 인도자’ 등으로 다양하게 부릅니다. 이런 용어들에 대해 저는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언어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 의미의 통시성이 있고, 어떤 특정한 시기와 집단의 특성에 따라 형성된 의미의 공시성이라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위의 세 가지 용어는 모두 우리가 사용하기에 좋은 용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사용해야 할 용어를 이 중에서 굳이 하나 선택해야 한다면 ‘찬양인도자’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워십리더’의 경우 앞서 예배음악 사역이라는 용어를 선택할 때의 기준처럼 외래어보다는 우리말을 먼저 사용하자는 의미에서 이 글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예배인도자’의 경우 또한 위에서 언급했던 예배 사역이라는 용어의 문제점과 어느 정도 동일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배음악 인도자’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말을 제 개인적으로 만들어내는 일 또한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시도가 될 것입니다.

사실 ‘찬양’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음악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높여드리는 모든 말과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원론적으로만 보면 음악을 넘어서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방식을 가질 수 있는 찬양이 현실적으로는 음악적인 의미로만 한정되는 상황이 다소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찬양이라는 용어는 예배음악이라는 형식이 건강한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잘 감당하면서 음악적인 용어로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 글에서는 이 세 가지 용어 중에 ‘찬양인도자’를 선택하여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음악이란 무엇일까?” 입니다.

전문 음악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목회자이자 전문 음악사역자로서 평소에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만 저의 음악적인 재능을 다 바치고 싶었는데 막상 음악 활동을 고민하다 보니까 대중음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버렸네요. 이런 생각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저는 예배음악 사역자가 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대중음악가가 되어야 할까요? 두 가지를 같이 한다면 저는 어디에 더 중심을 두고 활동을 해야 할까요?”

사실 제가 제시하는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특정한 음악 장르 안에 자신과 음악을 가두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음악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CCM 가수는 왜 CCM이라는 장르 안에만 갇혀야 하고 예배음악 사역자는 왜 예배음악 사역 안에만 갇혀있어야 할까요?
음악의 장르가 음악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가 음악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음악은 언어입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메시지의 주체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자기 생각을 담아서 어떤 대상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어는 대상과 내용에 따라 그 용법이 달라집니다. 아버지나 나이가 많으신 분께 말씀드릴 때 사용하는 말이 있고, 친구나 편한 관계 사이에 쓰는 말이 있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음악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할 때 쓰는 말이 있고, 공동체 구성원들 서로에게 쓰는 말이 있으며,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쓰는 말이 있습니다. 상황과 맥락에 맞게 적절하게 예배음악, 교회 음악, 기독교 대중음악이 다양하고 풍성한 메시지를 담아낸 채로 하나님과 나 사이, 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그리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불리고 나누어져야 합니다. 사실 또 하나의 질문이 여기에 덧붙여 이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음악이 선하고, 어떤 음악이 악한가요?

이 질문에 대해 저는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을 사용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바로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세 가지 렌즈로 이 질문을 분석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중에 음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음악은 하나님께서 지으셨을 그때는 선했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범죄로 온 세상 구석구석에 타락의 영향력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의도에서 빗나가는 죄로 인한 왜곡과 변질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중에 음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음악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음악에 미치는 영향력입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내 개인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만물의 회복을 함께 경험하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음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음악 또한 구속의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음악이든 회복의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 음악인들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든지 ‘회복’의 관점으로 음악 활동을 고민해야 합니다.

모든 음악은 각자에게 주어진 ‘성숙의 시간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1000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서 선별된 500여 곡으로 구성된 찬송가와 50년 정도의 역사 속에서 선별된 500여 곡으로 구성된 찬양악보집을 어떻게 단순 비교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짧다는 이유만으로 판단 받거나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언젠가 자기만의 ‘성숙의 시간표’ 안에서 자라나게 될 테니까요. 많은 곡이 생겨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여가는 성숙의 역사가 그 음악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처음 접하거나 나의 취향과 다른 음악을 접할 때 보통 연주하는 음악가의 태도나 느낌, 그리고 그 연주자의 실력에 기초해 그 음악 장르 전체에 관해 판단 내리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한 연주자들의 실력이나 태도나 누군가의 주관적인 느낌만으로 그 음악 장르 자체가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식의 판단을 섣불리 내려서는 안됩니다.

음악은 회복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의 언어처럼 서로 다른 대상을 구분 짓고 끊어내며 분리하고 헤어지게 하는 역할이 아니라,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의 방언처럼 서로를 이어주어 만나게 하고 소통하게 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당연하지만, 너무 중요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조금은 딱딱하고 어려운 내용이더라도 예배음악 사역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맞닥뜨려야 하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용이기에 살펴보았습니다.

전영훈 (삼일교회 청년부 사역 담당목사, 소망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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