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는 199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청자철재상감초문매병이 297만2500달러(약 33억8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크리스티 경매에서 팔린 고려자기로는 역대 최고가이다. 고려자기는 고려불화와 함께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고려시대의 미술품이다. 한국미의 자랑이다. 익히 알다시피 고려자기는 고려 고분에 시신과 함께 묻혀 있던 기물이었다. 그런 고려자기가 언제부터 지상의 햇빛을 받으며 미술품으로 변신했을까.
199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33억8000만원에 팔린 고려 청자철채강감초문매병. 고려자기로는 크리스티 경매 사상 역대 최고가였다.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 통감부 정치가 시작되었을 때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 광(狂)’으로 불릴 정도로 고려자기 애호가 였다. 그를 위시한 일본인 통치층의 개인적인 수집열을 업고 고려자기가 무덤에서 약탈돼 고색창연한 ‘미술품’으로 아연 재발견이 된 것으로 흔히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땅속에 묻혀 있던 고려자기를 일본인 호사가들보다 20∼30년 먼저 미술품으로서 애타기 찾았던 이들은 서양인들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쉬느와즈리(서양인들의 동양 도자기 애호)’의 영향을 받아 고려자기를 수소문하고, 수집하고, 감상했던 것이다. 중국에 이어 일본에 빠졌던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했던 일본 도자기가 조선에서 배워온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에 중국 자기, 일본 자기에 이어 고려자기를 구입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 개항 이후 국내에 거주하거나 일시 체류한 서양인들은 외교관, 의사, 군인, 저널리스트나, 지리학자 등그 직업과 상관없이 고려청자를 비롯한 한국의 골동품을 수집했다는 사실은 각종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흔히 회자되는 사례는 한성법어학교의 도예 교사인 마르텔(Emile Martel, 1874-1949)의 회고담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1894년)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 때에는 이렇다 할 재미있는 골동품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프랑스 공사 플랑시(Collin de Plancy) 씨의 집이라든지, 미국 공사 알렌(Horace Allen) 씨의 집에서 처음으로 고려자기를 관상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그러한 고려자기 꽃병이나 항아리․접시․사발 같은 것은 서울 거리를 아무리 걸어도 어느 골동상에서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구하려 해도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 해 후가 되니까 스스로 구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조선인이 자꾸 팔러 오는 바람에 차차 수집을 하게 되었다.

마르텔의 회고담은 1894년 이전에 한국에 체류하였던 서양인, 특히 외교관, 선교사 등 지식인층 사이에서 고려청자가 음성적으로 거래되어 감상되는 단계까지 와 있었음을 보여준다.
칼스의 '풍물지'에 그가 입수한 것이라고 그려넣은 고려청자들.

이보다 10여 년 앞선 1880년대 초반에 이미 고려청자가 서양인들에게 판매된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1884∼1885년 조선 주차 영국 영사를 지낸 󰡔조선 풍물지(Life in Korea)󰡕의 저자 칼스(William Carles, 1848-1929)가 서울에서 완벽한 형태의 고려청자 36점을 구한 것은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해군 무관 버나도와 선교사 알렌이 수집해 스미스소니언박물에 보낸 정병, 매병, 접시 등의 고려자기.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의 파견 혹은 의뢰에 의해 한국에서 민속품과 미술품을 수집했던 세 사람, 즉 해군 무관 버나도, 조류학자 주이,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의 수집품에 고려청자 정병, 매병, 접시 등 9점이 포함된 사실이 확인이 되었다. 고려청자는 미군 해군 무관 버나도와 선교사이자 외교관 알렌이 서울과 송도에서 각각 구입한 것으로 스미스소니언의 컬렉션 리스트에도 표기되어 있다. 주이 역시 무덤에 부장된 고려자기를 매입한 바 있다. 스미스소니언을 위한 이들의 수집 활동은 1881∼1885년에 이루어졌다.

1884년 조선을 찾은 영국인 고고학자 고랜드(W. Gowland)도 한국 미술품에 관해 쓴 글에서 “내가 처음 고대의 항아리를 만난 것은 서울에서였다. 송도에서 가져온 빛나는 크림색의 것으로,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나온 것”이라며 고려자기를 거래한 사실을 전한다. 아울러 “부산으로 가는 도중에 스미소니언의 컬렉터인 주이를 만났으며 그는 몇 개 얻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고 적었다. 고려청자 수집이 개항 초기인 1880년대에 이미 한국을 찾은 서양인들 사이에 공유된 하나의 문화적 경향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고려자기는 외교적 답례품으로도 사랑 받았다. 명성황후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Veber, 1841-1910)와 자신이 어의를 지냈던 릴리어스 언더우드(Lilias Underwood, 1851-1921)에게 각각 고려청자를 하사한 바 있다.
명성황후가 자신의 어의를 지냈던 릴리어스 언더우드에게 하사한 고려청자.

이는 일본인 통치관료층의 고려자기 수집열 이전에 서양인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고려청자의 열렬한 애호가들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지만 지금까지는 ‘일본인 통치관료의 문화재 수탈론’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18세기 이후 서양에 분 극동에 대한 관심이 한국 미술품 수집에 나서게 하는 요인이 되었고, 서양 외교관들의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과 수집은 도굴품이나 가전(家傳) 되어 오던 고려청자가 유통되는 초기 시장을 열었다. 따라서 필자는 고려청자 시장이 개항기에 태동했다고 본다.

일본의 사학자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의 회고는 이를 뒷받침해준다.

“경성에 영사관이 설치되자마자 무슨 일에서든지 열심인 구미 외교관들은 고국에 조선의 특산물을 보내고,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 사이에는 기행문을 통해 신흥국의 풍토를 소개하는데 진력하여 조선의 토속품을 폭넓게 수집하는 이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중략). 따라서 메이지40년(1907)을 전후해서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유물이 활발하게 도굴되어 아름다운 청자, 백자가 연이어 시장에 나왔다. 이즈음에 서양인들이 명과 청의 화려한 적회금은채 도기들을 보는 눈이 생기고 송과 원의 청순한 도자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고려자기도 그 취향에 부응해 그들의 수집욕을 채우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조선의 물건이 미술품으로 감상되기에 이르렀다.”

강조하자면, 중국자기에 투영된 서양인의 시선이 그대로 고려자기에 전이되었으며 이런 관심이 사물로서의 고려자기를 미술품으로 승격시키는 데 일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고려자기 구매 배경에는 경제적 요인도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중국 송대 자기와 일본의 자기는 이미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시장이 형성되어 값이 많이 올랐기 때문에 시장 자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값이 싼, 한국의 고려청자로 눈을 돌렸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