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상 에세이] 파리(paris) : 종교개혁자들의 바벨론

어쩌자고 종교개혁지 탐방 (16)


우리의 탐방은 드디어 모듈 3번에 접어들었다. 종교개혁지 탐방의 핵심(core) 지역이다. 이 지역들은 비교적 가까이 몰려있으며, 관광 산업이 발달해서 여행하기도 좋고, 풍광이 아름답고, 선진국이라서 이래저래 배울 점도 많다. 짧은 기간에 종교개혁지 탐방을 하실 분에게는 가장 먼저 추천하는 지역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에 강한 영향을 끼친 종교개혁자 장 칼뱅과 그 제자들과 영적 후손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도시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무려 여덟 지역을 방문한다.

모듈 1. 이탈리아 : 로마, 바티칸, 폼페이
모듈 2. 체코/독일 : 프라하, 따보르, 비텐베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 하이델베르크
▶ 모듈 3. 프랑스/스위스 : 파리, 누아용, 상티, 스트라스부르, 라로셸, 제네바, 바젤, 취리히
모듈 4. 영국 : 런던, 에든버러, 세인트앤드루스

파리. 이 도시의 느낌을 한 문장으로 말하라면 ‘로마를 뻥튀기해놓은 듯한 거대도시’라고 하겠다. 시내 건물들의 양식이 로마처럼 오래된 느낌이면서도 큼직큼직하다. 하긴, 천 년 하고도 오백 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에 지어진 도시이니. 지금 파리의 모습은, 19세기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제2 제정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도로는 재정비해서 넓고 곧게 뻗어 있고, 건물들은 규격화되었다.

이제 이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에서 무엇을 찾아다니면 좋을까. 파리에서는 총 세 편의 글을 연재한다. 앞의 두 편은 먼저 무엇을 보면 좋을지를 소개하고, 세 번째 편에서는 파리 시내 당일치기 추천 코스를 지도와 함께 제시하려고 한다.

소르본 대학가 이야기

유럽 대륙의 중심지 파리에도 당연히 종교개혁의 바람은 불어왔다. 하이델베르크 편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파리의 종교개혁도 대학가에서부터 움텄다. 그래서 종교개혁지 탐방팀은 파리의 소르본 대학가를 한 번쯤 거닐어볼 필요가 있다.

유럽의 오래된 대학들은 우리나라처럼 담장이 둘러쳐진 캠퍼스에 건물이 모여 있는 스타일이 아니다. 단과별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처음엔 건물 한두 채만 사용했겠지만, 사람도 늘고 학과도 늘면서 주변 건물로 조금씩 확장되었다. 그러니까 중세 때부터 이어져 온 역사가 대학 건물과 캠퍼스는 물론, 도시의 형태에도 영향을 끼친다. 물론 유럽에도 애초에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 설립되었던 대학은 저렴한 땅값 덕분에 잔디가 깔린 넓은 캠퍼스나 정원을 갖추고 시작한 경우도 있다.

소르본 대학은 파리는 물론 유럽 전체에서도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현재 파리에 방문해서 만날 수 있는 소르본 대학은 중세 대학의 느낌은 거의 다 사라졌다고 봐야겠다. 시민혁명을 거친 프랑스는 나폴레옹 때 대학들의 격차를 모두 없애버렸다고 한다. 즉, 서울대 연고대 등의 대학 서열을 없앴단 소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방법은 간단했다. 학교 이름을 지우고, 대신에 파리 제 1대학, 제 2대학 이런 식으로 숫자만 붙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나름 괜찮은 생각이다. 지구촌 시대에 전 세계와 경쟁하는 마당에 학교 간 경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세계를 상대로 움직이는 실력을 갖춰야 남을 돕거나 협력하여 이끄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우리와 같은 답사객들에게는 다소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건물마다 별 특색이 없으니 말이다.


▲ 미색의 거대한 석조 건물들이 들어선 소르본 대학 거리

그래도 소르본이라는 현판이 아직 남아있는 건물이 있다. 대학 건물마다 원래 이름처럼 보이는 라틴어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중세 땐 소르본 대학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라틴어 쓰는 사람들’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은 까르티에 라탱(Quartier Latin: 라틴어 지구)으로 불린다.

앙리 4세 이야기

이처럼 파리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파리는 하이델베르크와 달랐다. 하이델베르크는 종교개혁에 우호적인 인물이 다스리던 도시였다면,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대표적인 국가였다. 당연히 왕권과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보였던 종교개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체계적이고 위력적인 탄압을 견뎌야만 했던 프랑스의 신교도들을 ‘위그노’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파리에서 위그노들의 흔적을 또한 찾아다닐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지배자가 폭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앙리 4세와 같은 인물은 결이 달랐다. 그는 나바르 왕국의 왕자였다. 나바르 왕국은 신교도를 받아들이고 피난처가 되어 준 프랑스 곁의 작은 국가였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을 철저히 짓밟았던 카트린 드 메디치의 딸 마르그리트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 결혼식 날이 끔찍한 역사의 현장이 되고 만 것이었다. 성 바르톨로뮤 학살 사건. 카트린 드 메디치는 당시 신·구교의 갈등을 일거에 해결할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으로, 결혼식에 참석한 위그노 하객 및 파리의 위그노들을 모두 살육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앙리 4세는 그런 격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삼엄한 왕실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구교도가 되겠다는 서약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앙리 4세는 목숨을 건지려고 신념을 버린 비굴한 사람이다. 그런데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오묘하게 흐른다. 카트린 드 메디치의 아들들은 후사가 없거나 빨리 죽어서, 결국 앙리 4세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공포하고서, 신구교 간에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다. 정확히는, 국교는 여전히 구교였지만, 신교도가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지역들을 최대한 할당하여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도시가 나중에 가볼 라 로셸(La Rochelle)이다. 이제 프랑스는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잠깐 멈추고 평화를 맞이한다. 앙리 4세는 소탈한 매력을 뽐내며 실리적인 개혁정책을 펼쳐갔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없었다. 극단적인 구교 세력들은 앙리 4세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서 늘 그를 제거하고자 했고, 그는 무려 17차례의 암살 시도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 시내의 한 골목에서 첩보작전 같은 활극이 벌어지고 앙리 4세는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평소 왕의 마차가 지나가던 길목을 마차 사고로 위장해서 막아놓고, 다른 좁은 골목으로 우회하는 사이에 암살범이 뛰어든 것이다.

그 골목이 어디일까. 종교개혁 탐방팀은 파리에 왔으면 적어도 앙리 4세 암살사건의 현장 정도는 찾아가 보는 것이 좋겠다. 자세한 코스는 이후 연재할 글에서 지도와 함께 안내할 것이다.


▲ 지금 앙리 4세가 암살된 현장은 관광객이 무심히 지나치는 까페 골목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우리가 내용을 알고 나서 그 자리에 간다면, 16세기 역사의 현장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숙연해질 것이다.

프랑스를 여행하다 보면 앙리 4세의 흔적이 여기저기 많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그에 대한 기념물이 있고, 퐁뇌프(다리)에도 그의 기마상이 있다. 이곳 사람들이 그를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종교적 정체성을 떠나서, 그가 백성들을 사랑했고, 백성이 잘살도록 노력했던 왕이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낭트칙령을 통해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는 신교도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동시에 구교도인 국민들 역시 이웃 사랑의 대상으로 잘 섬기려 했던 것이 아닐까.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앙리 4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위그노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프랑스의 정신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앙리 4세의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과 결정을 했을까. 신교 신앙을 버린 듯 보였던 그의 선택을 쉽게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볼수록, 점차 세상과 인간은 그렇게 쉽게 편 가르고 구분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황희상 (’특강 종교개혁사’ 저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