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왼쪽)과 배우 송강호가 지난달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가장 정교함이 빛나는 것은, 밥때를 너무 잘 지켜준다는 거죠.”

영화 ‘기생충’의 배우 송강호가 칸 국제영화제 공식 석상에서 ‘봉테일’ 봉준호 감독의 세심함을 칭찬하며 한 말이다. ‘기생충’은 스태프 전원이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것으로도 화제가 됐다. 봉 감독은 “전국영화산업노조를 중심으로 2~3년 전부터 논의가 시작돼 정착돼온 문화”라며 “기생충이 특별히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봉 감독의 말처럼 충무로에서는 몇년 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논의가 시작돼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뤘다. 반면 드라마 업계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나마 지난해 7월 1일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방송 스태프들도 노동시간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방송업이 주52시간을 적용 받지 않는 특례업종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커다란 진전인 건 확실하지만 현장의 변화가 빠른 건 아니다. 거꾸로 노동 강도는 세지고 임금은 줄어드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지난 21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관계자들을 만나 아직도 힘겨운 방송 촬영현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 드라마 촬영현장 모습. 김두영 지부장 제공

하루 20시간 노동 사라졌지만…
3년 전 겨울, 미니 드라마 제작 당시 희망연대노조 김두영 방송스태프 지부장은 26일 동안 총 531시간을 일했다. 하루 평균 20.4시간이다. 게다가 때는 한겨울, 하필 유난히 산속 신(장면)이 많은 촬영이었다.

김 지부장은 “하루도 안쉬고 추운 곳에서 연속으로 12일을 일한 뒤 사우나에서 씻지도 못하고 픽 쓰러진 적이 있다”며 “우리 스태프들은 톱니바퀴처럼 함께 움직여야 해서 독립적으로 출퇴근을 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그때는 다들 상태가 비슷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특례업종 제외 이후 상황은 그나마 나아졌다. 주당 최대 근로시간 68시간을 지켜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도 함정은 있었다. 하루 최대 노동시간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당 최대 68시간은 지키되 같은 양의 업무를 3일 동안 몰아서 끝내도록 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직 기술 스태프 강태수(가명)씨는 “3일 안에 68시간을 몰아서 일하게 하는 경우가 생겼다”며 “이렇게 되면 일은 일대로 하면서 잠도 못잔다. 그리고 임금까지 줄어든다”고 말했다.

몰아서 일을 하면 수입이 줄어드는 이유는 많은 방송 스태프가 일급으로 급여를 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도 추가수당이 없다. 8시간을 일하든, 20시간을 일하든 그냥 하루 일당을 받는다는 뜻이다. 최근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의 가혹한 노동강도가 논란이 됐다. 대부분의 드라마 현장은 엇비슷한 상황이다.

한 지상파 드라마 촬영팀의 근무 스케줄

물론 무작정 길게 일하는 현장도 여전히 존재한다. 현재 방송 중인 모 지상파 드라마 촬영팀의 3월분 촬영 일정표를 살펴보면 둘째 주는 총 82시간 20분 일했다(이동시간까지 총 95시간 50분). 셋째 주의 경우 58시간 30분으로 촬영한 시간은 주 68시간을 넘기지 않았지만 이동시간까지 합하면 73시간이었다. 넷째 주는 이동시간까지 합해 주당 100시간, 촬영 시간 만도 80시간 23분이나 됐다. 그나마 양호했던 5월의 경우 비교적 짧게 일한 경우가 주 51.6시간이었다. 주 5일을 기준으로 하루 10시간 정도였다. 100시간과 50시간을 번갈아 일하는 게 그나마 개선된 현장이라는 뜻이다.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지난 22일 커피차와 함께 드라마 촬영현장을 방문했다. 김두영 지부장 제공

노동시간? 그마저도 의미 없는 방송 작가
촬영 스태프에게는 그나마 출퇴근이라는 게 적용된다. 그마저도 없는 게 방송 작가다. 컴퓨터를 켜면 그곳이 곧 근무지다. 대체인력도 없다. 쉬는 날에도 ‘일단 방송은 나가야 하니’ 집에서도 전화를 받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원고를 쓴다.

모 교양 프로그램의 메인작가로 일하는 경력 13년 이상의 박수빈(가명)씨는 “다른 직군은 한 명쯤 빠져도 괜찮지만 작가의 일이라는 건 대체인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한 명도 빠질 수 없는 상황”이라며 “인아웃(업무의 개시와 종료) 시간이 따로 없다”고 씁쓸해했다.

임금은 편당으로 지급된다. 일주일에 한 번 방송이 나가면, 한 편에 해당하는 고료를 받는 식이다. 출근 시간 이외의 노동 시간 역시 일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박 작가는 “내가 언제 일했는지 누가 기록하는 것도 아니고 고료가 편당으로 지급되니 작품 생산에 소요되는 시간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지난달 16일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서울 은평구 희망연대노조 회의실에서 '방송스태프 노동자 근로조건 개선상황' 중간점검 간담회를 가졌다. 김두영 지부장 제공

계약서 없는 노동 “그래도 밥은 주잖아”
3~4년 전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한 PD가 스태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밥 주는 게 어디야?” 현장에서도 바로 논란이 됐다는 이 발언의 배경에는 식사 제공을 ‘호의’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턴키계약이 숨어있다.

방송업계에는 턴키계약이라는 특수한 방식의 계약형태가 존재한다. 제작사가 제작비 절감을 위해 팀장급 스태프와 팀 단위 용역 계약을 맺어 사용자인 팀장이 자신과 팀원을 책임지도록 만드는 관행이다. 팀원 개개인의 각종 수당이나 식대, 장비사용료 등 구체적 비용산출 없이 총액으로 계약을 맺는다. 팀장은 계약상 사용자 위치이지만 현장에서는 피사용자로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다. 따라서 턴키계약을 맺은 팀의 팀원들은 어디에서도 권리를 보장받기 어렵다.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강태수씨는 “특히 지난해 7월 1일 이전에는 기술 스태프와 감독을 제외하고 그 아래 사람들은 계약서를 본 적조차 없다”며 “지난해 말부터 계약을 하는 경우가 생기기는 했지만 계약서 쓰고 찍는 드라마가 아직도 30~40%밖에 안된다. 나머지 드라마는 여전히 턴키계약을 한다”고 말했다. 최근 투입된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강씨 역시 턴키계약을 강요받았다고 했다.

결방의 최대 피해자
작가 채용은 구두계약으로 이루어진다. 메인 작가가 공고를 내면 작가들이 지원한다. 박수빈씨가 전하는 채용 과정이다. “괜찮은 것 같으면 전화해서 약속을 잡고 면접을 본다. 월요일부터 출근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끝. 가능하다고 하면 달력에 적고 그때부터 페이 책정이 된다.” 이렇게 채용이 진행되다보니 일을 하고도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박씨는 “계약서가 없으니 보호해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막내 작가는 한 주분의 고료가 40만~50만원 선에서 책정된다. 결방이라도 되면 피해는 고스란히 작가들이 받는다. 박씨도 올초 결방분에 대한 급여를 받지 못했다. 그는 “지난해 초에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과 아시안게임 등 국가적인 행사들이 정말 많았다”며 “두세번 결방되고 한 달에 2~3번 방송이 나가면 막내 작가의 경우 월 수입이 100만원 남짓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꿈을 좇아 서울로 상경한 막내 작가들의 경우에는 아예 생계를 잇는 게 불가능하다. 박씨는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온 친구들은 월세를 내야 한다.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내가 한 달에 벌 돈이 얼마인지를 예상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집에 가야 한다”며 “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빛미디어인권센터를 방해 현장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희망의 시작…표준근로계약서의 도입
지난 18일 지상파방송3사・언론노조・드라마제작사협회・희망연대노조가 지상파 방송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 협의에서 표준근로계약서 도입에 합의했다. 오는 9월까지 표준인건비·표준근로계약서의 기준을 만들면 내년 초 방영될 드라마부터 제작현장에 적용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지난 21일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서울 마포구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방문해 ‘방송스태프 노동자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민주당은 “표준근로계약서가 드라마 제작 현장에 잘 정착될 수 있도록 앞으로 저희 당과 을지로위원회가 끝까지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는 민주당이 각 분야 방송스태프들의 고충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용관 한빛센터 이사장은 이날 “지난 18일 4자협의에서 근로계약서를 비롯해 방송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비로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졌다”며 “물론 출발이다. 앞으로도 사자협의체의 협의내용이 방송현장에서 정착되도록 저희 단체들은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신유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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