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다음 달 11일이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구속 기간이 끝나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서는 그가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일일이 딴죽을 걸며 시간 끌기 전략에 ‘올인’한 끝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을 지난 2월 11일 구속 기소했지만 구속 재판 기간 6개월 중 5개월 동안 정작 공소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한 차례도 다퉈보지 못했다. 증인신문 역시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재판부가 2주간의 하계 휴정기 중 첫 주(이달 29일~다음 달 2일)를 쉬기로 하면서 그를 구속 상태에서 재판할 수 있는 기간은 3주 남짓 남았다.

이제껏 재판이 공전한 까닭은 ‘양박고’로 불리는 피고인 양 전 대법원장,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이 본격적인 법리 공방에 앞서 검찰의 증거 조작 가능성, 압수수색 절차의 위법성 여부 등 증거능력 유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재판부는 검찰이 압수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USB 내 파일, 법원행정처 문건 등과 실제로 법정에 제출한 증거자료의 동일성 여부, 압수수색 절차의 위법성 등을 검증하는 데 공판기일 상당 부분을 써야 했다.

그러나 피고인 측이 내놓은 지적들은 대부분 지엽적인 것이었다는 평가다. 검찰이 확보한 문건과 재판부에 제출된 문건의 쪽수, 글씨체 등이 서로 다르다는 문제제기가 대표적이다. 검찰은 검증기일 내내 “파일을 합쳐서 출력하는 과정에서 쪽수가 달라졌다” “출력한 컴퓨터에 특정 폰트가 없었다”는 등의 해명을 반복해서 내놔야 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문제될 만 한 게 하나라도 나올 경우 검찰 수사에 흠집을 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사법농단 재판 시간끌기 사례>
피고인들의 주장
검찰 측 해명
“검찰이 압수한 문건과 재판부에 제출한 문건의 쪽수가 다르다”
“여러 문건을 하나의 파일로 만들어 출력해 쪽수가 늘어난 것”
“파일과 출력물 글씨체 다르다”
“검찰이 출력한 컴퓨터에 특정 폰트가 미설치돼 나타난 현상”
“한글 파일의 ‘하이라이트’(형광펜 표시)가 출력물과 다르다”
“검찰이 문건을 보면서 주요 부분을 하이라이트 표시해 출력한 것”
“출력된 증거 상단에 특수문자가 인쇄돼 있다”
“출력 과정에서 이면지 등이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이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될 경우 공판은 검찰에게 불리해질 전망이다. 그가 사건 관계자들과 접촉해도 제지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양 전 대법원장은 풀려나는 동시에 활개치고 돌아다닐 것”이라고 말했다.

신임 검찰총장이 취임하는 오는 25일 이후 있을 검찰 하반기 인사도 변수다. 검찰 내부에서는 새로운 조직 구성이 이뤄지면 지금만큼의 전폭적인 파견인력 투입 등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수사기록만 8만쪽이 넘는 만큼 수사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검사가 공판을 진행하기는 쉽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공소유지 역량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 등이 내년 4월 총선 이후 1심 선고를 받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국 흐름이 바뀌면 선고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각에서는 1심에서 재판을 지연시켜 검찰의 힘을 최대한 빼놓고, 2심이 열리는 서울고법에서 승부를 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현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이 1심 재판부와 달리 양 전 대법원장 재임기에 승진했다는 점을 노린다는 것이다.

검찰은 임 전 차장의 구속만료가 예상되는 내년 1월 무렵까지 1심 선고를 끌어낸다는 방침이다. 임 전 차장은 당초 오는 11월 13일 구속기간이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지난달 초 구속기간 산입 정지 효력이 있는 재판부 기피를 신청하면서 석방일도 늦어지게 됐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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