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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은 에세이] 폭풍우와 함께 춤을

겨울이 그대에게 주는 선물 (3)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아빠 회사의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여, 엄마는 나를 이모 집으로 피신시켰다. 매일같이 채권자들에게 협박 전화가 걸려 오고, 아빠는 술을 먹고 거실에 누워 있는 그 상황이라도 모면하게 하고 싶었던 엄마의 배려였다. 감사하게도 이모가 나를 기꺼이 받아 주었기에 나는 이모네 집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엄마는 회사를 살려 보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저녁이 돼서야 나를 보러 왔다. 온종일 시달린 엄마는 그야말로 녹초가 된 상태였고, 그런 엄마를 위해 이모는 분주하게 요리를 했다. 늘 정신없었던 탓에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었는데, 마음 따뜻한 이모 덕분에 우린 때때로 푸짐한 저녁상을 먹을 수 있었다.

다 같이 식탁에 모이면 정해진 것처럼 회사의 상황, 아빠의 상태,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어린 나에게 너무 큰 짐을 주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모는 가슴을 치며 울었다.

“내가 너희 집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그런데 눈물을 흘리다가도 이모는 갑자기 일어나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

“경은아, 이렇게 울고만 있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우리 춤출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희 집 때문에 속상해서 제 명에 못 살겠다던 이모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이내 쿵작쿵작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런 이모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이런 웃음도 얼마 만인가 싶어 슬펐다.

이모의 쿵작쿵작 리듬은 전염성이 짙었다. 이모가 뽕짝 선율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기 시작하니 내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거실에는 축제의 장이 열렸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과 기괴한 댄스는 참으로 묘한 조합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괴짜들 같아 보였는지 엄마도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인생 별거 있니? 우리 이렇게 살자.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고, 또 이렇게 웃어넘기면서 말이야.”

그 후로도 우리는 종종 슬픈 일이 생기면 위로하기 위해 모였다가, 춤을 췄다. 때론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틀어놓고 우리만의 탱고를 추기도 하고 ‘남행열차’를 구수하게 부르면서 추는 막춤도 장관이었다.

물론 그 춤이 우리를 가혹한 현실로부터 구원해 주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돈을 주지도 않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도 않았으며, 아빠를 회복 시켜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다가오는 두려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에 날렵한 무기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춤은 때론 극한의 힘든 상황들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의연함을 주기도 했다.

우리는 매 순간 행복을 갈망하며 살아가지만, 삶은 우리에게 늘 단 것만 주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가오는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며 늘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싸우며 살아간다. 누가 그 고통을 대신해 줄 수도 없다. 하지만 삶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인생은 폭풍우가 오지 않기만을 비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가 오더라도 그 속에서 춤추는 방법을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전경은 (강사, 청소년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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