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건축가’ 이타미 준(1937∼2011). 재일교포 2세인 그의 본명은 유동룡(庾東龍).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후지산이 바라보이는 바다의 도시 시미즈(시오즈카현)에서 성장했다. 건축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그가 선택한 작가명은 ‘이타미’. 인근의 국제공항 이름을 딴 것이었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국제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에서 디아스포라 적 삶의 고뇌와 아픔이 묻어난다.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 속 제주 방주교회.

그런 그에게 한라산이 바라보이는 바다의 도시 제주는 제2의 고향이었다. 교포 건축주의 수주를 받아 포도호텔(2001), 수풍석(水風石) 미술관(2006), 두손미술관(2007), 그리고 방주교회(2009) 등을 지었다. 제주는 이타미 준의 건축 철학을 구현한 걸작들이 집약된 곳이었고, 이는 곧 제주인의 자랑이었다.

‘제주의 딸’ 정다운(44) 감독이 제작한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가 15일 개봉한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건축대학원에서 ‘건축과 영상’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정 감독의 첫 작업이다. 지난 5월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분에서 수상한 뒤 이번에 상업영화관에도 진출한 것이다. 영화 개봉에 즈음해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웅갤러리는 화가 이타미 준을 보여주는 개인전 ‘심해(心海·9월 7일까지)’를 마련했다.
'이타미 준의 바다'에 나오는 제주 포도호텔.

“건축은 물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인간의 온기, 건축의 야성미를 살려내고 싶다.”

매끈한 유리의 모더니즘 건축물과 달리, 이타미 준이 지은 집과 교회, 미술관에는 빛과 바람, 하늘 등 자연이 흐른다. 카메라는 그 건축물이 가장 빛날 수 있는 각도를 아는 듯하다. ‘포도호텔’의 지붕은 제주 오름이 포도송이처럼 낮게 엎드린 듯하고, 풍 미술관에선 나무 벽 틈 사이로 비치는 풀의 흔들림을 통해 내부에서도 바람을 느낀다. 석 미술관이 천장 모서리는 햇빛을 하트 모양으로 오려냈다. 영화는 작가 생전에 찍었던 것처럼 이타미 준의 건축 미학이 오롯하다.
작업실에서 회화를 그리고 있는 이타미 준.

반 시게루, 쿠마 캔과 등 그를 이해했던 동료 건축가, 아버지를 따라 건축가가 된 딸 유이화씨, 교포 출신의 건축주 등 삶을 증언하는 주변인 인터뷰를 통해 이타미 준의 삶을 비교적 풍부하게 보여준다.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작업대에 앉아 늘 마주했던 청화백자와 분청사기에는 어떤 해답이 있지 않았을까. 영화는 이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예산확보 문제 때문에 8년이나 걸렸던 지난했던 촬영 과정에 대한 미련 탓인지 과감히 쳐내지 못한 중복의 화면 탓에 속도감이 덜하지만 동시에 영화 전반에 흐르는 시적 여운도 갉아먹는다.
웅갤러리 이타미전 개인전 '심해' 전시 전경. 손영옥 기자

영화관을 나선 뒤 여유가 되면 웅갤러리로 가서 ‘화가 이타미’를 가보자. 영화에도 이타미 준이 큰 붓으로 바람을 그리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자칭 “화가가 되고 싶었던 건축가” 이타미 준의 회화는 20여 점이 나왔다. 캔버스와 종이 위에 그가 펼쳐놓은 것 역시 뭔가 만져지는 듯한 물질감이다. 캔버스 위에 짙은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흰 물감을 두텁게 바른 뒤 손가락으로 걷어낸 일명 손가락 그림에서는 댓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물감을 짓이겨 바른 표면에서는 분청사기의 질감이 배어나는 식이다. 마침 같은 고향 시미즈 출신으로 그가 양아버지처럼 의지했고 회화의 물성에 대한 가르침을 줬던 재일한국인 화가 곽인식(1919∼1988)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관에서 열리고 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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