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맞아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는 178인 중 유일한 생존자 백운호 선생이 14일 충남 천안의 한 카페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조효석 기자


어머니는 반년만에 유치장에서 나온 아들의 몸을 겨우 더듬거렸다. 겨우 12살 나이에 일제 경찰과 검사들의 고문도 두려움 없이 견뎌낸 아들이었지만 이날은 어머니에게 혼날까봐 잔뜩 움츠려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들은 어머니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밤낮없이 아들 걱정을 하느라 생긴 일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백운호(89) 선생에 눈에 눈물이 옅게 고였다.

백 선생은 15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 178명 중 유일한 생존자로 기념식 무대에 선다. 그는 12살이던 1942년 3월 이른바 ’황취소년단’의 일원으로 소학교에서 항일전단지를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죄목으로 일제 경찰에 잡혀들어가 9월까지 6개월 동안 유치장에서 고문을 견뎠다. 국민일보는 14일 백 선생을 천안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백 선생은 10살이던 1939년 6살 위 박영순 선생 등을 중심으로 모여 애국소년모임인 황취소년단, 일명 ’독수리소년단’을 결성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일제가 지지여론을 고취시키기 위해 관제 소년단을 만들려 애쓰던 때였다. 백 선생과 친구들은 일부러 경찰서 마당을 쓸며 일제를 지지하는 소년들인 척 위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곧 패망하니 협조하지 말자’는 전단지를 한지와 먹으로 써서 버스와 이천 시내에 써붙였다. 만주 독립군에 합류하기 위해 밭을 꾸리면서 돈을 모으기도 했다.

전단지가 발각된 건 백 선생이 소학교 6학년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이던 1942년 3월 말이었다. 일제 경찰은 그를 유치장에 가둬두고 밤낮이고 꺼내 배후를 캐물었다. 주먹으로 얻어맞고 죽도로 두들겨맞는 중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그를 검사가 홀로 찾아와 “왜 조선 독립을 외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담담하게 “조선사람이 조선 독립을 외치는 게 무슨 잘못이요”하고 답했다. 반년 뒤 유치장에서 풀려나왔을 때는 물론 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광복이 찾아온 뒤에도 백 선생은 나라를 위해 일했다. 나이를 속여서라도 육군사관학교 입대하려다 아버지 반대로 실패했지만 6·25전쟁에 참전해 11사단에서 이등상사로 복무했다. 백 선생은 “내가 어린 나이에 독립을 위해 일한 건 그 어떤 보상을 바란 게 아니라 그저 내 나라를 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면서 “어렵게 되찾은 나라를 위해 민족혼을 끝까지 잘 지켜줬으면 좋겠다. 어린 학생들부터 민족혼을 배우고 잊지 않아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천안=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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