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힘이 세다. 변두리 지역에 들어선 예술공간과 그곳에 입주한 예술가들이 지역 주민과 만나 상상 이상의 시너지를 낸다. 미술에 주눅이 들었던 동네 주민과 시장 상인이 예술과 친하게 되고, 예술가들은 그들로부터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한다. 국민일보는 그런 현장을 찾아 2회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작은 조각물들을 강낭콩 줄기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 붙인 곡선형 설치물 끝에 큰 흰 누에고치가 매달렸다. 자세히 보니 천 안으로 사람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부착된 마이크를 타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이 우우 흘러나온다.
정승 작가의 '프로메테우스의 끈 6'. 식물의 생육정보를 수치화해 만든 3D프린팅 조각 설치물 끝에 '인간 누에고치'가 매달려 있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인간 존재가 사이버상에서 ID 등 숫자화돼 떠돌아다니는 현실을 비꼰 작품이다. 최종학 선임기자

지난 22일 서울 금천구 범안로 금천예술공장. 서울문화재단 산하 작가 레지던시(창작 공간 무료 제공 프로그램) 공간인 이곳의 연중 최대 행사 ‘2019 다빈치 크리에이티브 페스티벌’ 개막을 하루 앞두고 프레스투어가 열렸다.

8회째인 이번 행사 주제는 ‘리빙 라이프’다. 수명 연장에 따른 100세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미디어아트로 푸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스웨덴 작가팀 '논휴먼 난센스'의 '핑크 치킨 프로젝트'. 유전자 조작된 분홍색 닭을 통해 기술 의존이 인류의 디스토피아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인류가 분홍색 닭을 너무 많이 소비해 분홍색 지층이 생겨나는 식의 발랄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최종학 선임기자

‘누에고치 인간’ 퍼포먼스를 선보인 정승 작가를 비롯해 미국 스웨덴 슬로베니아 등 국내외 13명(팀) 작가들이 참여했다. 정 작가의 ‘프로메테우스의 끈’은 식물의 생육 정보를 수치화해 3D 프린터에 입력한 뒤 조각으로 출력해 만든 작품이다. 설치물 끝부분을 로봇처럼 움직이게 했는데, 이는 ㈜로보티즈의 연구원과 협업한 것이다. 정 작가는 “사이버상에서 인간 존재가 수치화되면서 존엄성을 잃어가는 현실을 비판하고 싶었다”고 했다.

생명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 수명을 통제하는 자본과 정치, 권력에 대해 생각하는 작품도 많았다. 스웨덴 작가 팀 ‘논휴먼 난센스’는 ‘핑크 치킨 프로젝트’를 통해 유전자 조작 기술이 가져오는 인류의 미래를 재기발랄하게 비틀었다. 박얼 작가는 신경쇠약에 걸린 듯한 로봇을 재현해 인간과 로봇의 차이를 묻는다. 슬로베니아의 사샤 스파찰은 박테리아를 통해 발생하는 산소를 흡입하는 관객 체험형 작품을 통해 공기조차 통제하는 미래 사회를 경험시켜준다.

금천예술공장은 버려진 인쇄공장을 리모델링해 2009년 출범했다. 김진호 금천예술공장 매니저는 “예전엔 구로공단으로 불리며 공장이 즐비했지만, 지금은 공장들이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디지털단지로 거듭나고 있는 곳”이라면서 “동네 특성을 살려 인쇄 기술이 미래의 첨단기술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리라는 기대감을 담아 미디어아트 축제가 기획됐다”고 설명했다.
미디어아트 축제 때 주최측을 도와 전단 배포 작업을 한 동네 주민 신숙희(왼쪽)씨와 이순복씨. 최종학 선임기자

9월 11일까지 열리는 이번 축제는 올해가 10주년이라 더욱 잔칫집 분위기였다. 마침 동네 주민 신숙희(68)씨가 이웃 이순복(75)씨와 함께 전시장에 나타났다. 얼굴이 상기된 채 들어서는 그들의 손에는 지하철역에서 돌리고 남은 행사 전단이 들려있었다. 축제가 열리면 주민들도 설렌다. 개막식에 흥을 돋우기 위한 공연도 하고, 주민들이 부친 부침개 등이 잔치 음식으로 제공된다. 신씨를 비롯한 동네 아파트 주민 4명은 전단 배포 작업을 도왔다. 토박이 이씨는 “어휴, 4000장 돌리는 게 만만치 않네. 그래도 개막식에 동네 사람이 500명 넘게 모이니 뿌듯하다”며 웃었다.

신씨는 베니스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은 임흥순씨가 2011년 레지던시 입주작가 시절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 그들이 직접 구로공단을 주제로 영화를 찍는 워크숍 ‘금천 미세스’를 진행할 때 참여한 바 있다. 그는 그때 찍은 영화로 노인영화제 장려상을 받았다며 “이래 봬도 ‘감독 신숙희’”라고 자랑했다. “예술이 뭔지도 모르고 살다가 금천예술공장 덕분에 시나리오도 써보고 감독도 해봤으니 평생 금천예술공장에 충성해야죠.” 예술이 지역과 상생하는 풍경을 보는 듯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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