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시도 도밍고가 25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공연이 끝난 뒤 극장 밖에서 기다리던 팬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고 있다. AP뉴시스

‘오페라계 슈퍼스타’ 플라시도 도밍고(78)가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이후 첫 무대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 노래를 마친 뒤가 아니라 노래를 하기 위해 무대에 섰을 때 이미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고 AP통신 등 해외 언론이 보도했다.

도밍고는 25일(현지시간) 세계적인 음악축제 가운데 하나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콘서트오페라 ‘루이자 밀러’에 출연했다. 지난 13일 AP통신이 그가 여성 성악가와 무용가를 상대로 성추행 및 성희롱을 일삼아 왔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난 이후 처음이다. 당시 가수 8명과 무용수 1명 등 9명이 도밍고의 부적절한 행위가 30년 이상 오페라극장 등에서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루이자 밀러’ 공연은 도밍고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오페라 관객의 반응을 보여주는 가늠자라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모았다. 그리고 결과는 성추행 의혹에도 불구하고 도밍고에 대한 절대적 지지였다.

이날 ‘루이자 밀러’ 공연에서 도밍고는 타이틀롤인 여주인공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했다. ‘쓰리 테너’로 불리는 등 테너로 각광받아온 그는 2009년 바리톤으로 전향했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뒤 10분이 넘는 박수갈채가 이어졌지만 기립박수는 앞서 도밍고가 노래하러 무대에 혼자 섰을 때 나왔다. 관객으로 온 독문학 교수 미카엘 부르가세르 교수는 뉴욕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공연이기도 했지만 도밍고에겐 대중으로부터 복권되는 자리였을 것”이라면서 “관객들은 무대에 등장한 도밍고를 응원하기 위해 기립했다. 그것은 도밍고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동료 성악가들은 도밍고에게 관객들의 환호가 집중될 수 있도록 물러서기도 했다. 도밍고는 관객을 향해 “멋진 관객, 좋은 공연이었습니다. 제 말은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연이 끝난 뒤 극장 밖에서 그는 자신을 기다리던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기도 했다.

AP통신의 보도 직후 도밍고가 총감독을 맡고 있는 로스앤젤레스(LA) 오페라는 이번 의혹에 대한 조사 방침을 밝혔고,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각각 9월과 10월로 예정된 도밍고의 콘서트를 취소했다. 하지만 2곳 외엔 지금까지 취소된 도밍고의 공연은 없다. 그나마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등 영·미권에서는 도밍고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LA오페라의 조사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인데 비해 유럽 지역에서는 앞다퉈 도밍고를 감싸고 나섰다.

플라시도 도밍고는 25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루이자 밀러' 공연이 끝난 뒤 극장 밖에서 기다리던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함께 사진을 찍었다. AP뉴시스

안나 네트렙코, 소냐 욘체바, 이리나 룽구, 마리아 굴레기나, 하비에르 카마레나는 등 수많은 남녀 성악가들은 물론 각국 오페라 커뮤니티 역시 도밍고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표명했다. 이들은 SNS에서 ‘StandByDomingo’ ‘ISupportPlacidoDomingo’란 해쉬태그를 달고 도밍고 지지를 앞다퉈 선언했다. 헬가 라블 슈타들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대표 역시 “나는 도밍고를 25년간 알아왔다. 만약 그가 성추행을 했다면 그동안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겠지만 나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도밍고에 대한 지지를 피력한 바 있다.

이미 음악계에서는 도밍고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조사나 징계나 흐지부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영국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도밍고의 행태가 오페라계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져 있지만 LA오페라의 조사 이후 도밍고가 총감독과 예술감독을 사임하는 수순에서 마무리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레브레히트는 그 이유로 도밍고의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9명이 모두 무명이라는 것, 그들이 도밍고에게 ‘No’라고 말했다고 주장하지만 도밍고가 강압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증거가 없는 것, 이들 9명 이외에 추가 고발자가 없다는 것, 도밍고가 그동안 음악계에서 수많은 헌신을 해왔으며 지지를 받는 것, 오페라계가 여전히 세계 최고의 박스오피스를 자랑하는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을 꼽았다.

사실 도밍고에 앞서 이미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음악가들 가운데 유럽이 주무대인 경우 흐지부지 된 사례가 있었다. 스위스 출신의 지휘자 샤를 뒤투아와 이탈리아 출신 지휘자 다니엘레 가티는 각각 2017년과 2018년 다수의 여성들로부터 성추행이 폭로되면서 당시 영국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등 상임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들은 1년도 채 안돼 음악계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휘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이들 예술가들의 도덕적 일탈이 용인되는 이유로 ’위대한 예술가’는 사회 관습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예외적인 관념이 오랫동안 예술계에 뿌리내린 것이 꼽힌다. 이와 함께 현대 사회에서 쇠퇴해가는 예술장르인 클래식음악과 오페라가 스타 예술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도 꼽힌다.

한국의 음악 칼럼니스트 노승림은 성추행 의혹 이후 도밍고에 대한 오페라계 관계자들이나 팬들의 지지에 대해 “음악계의 고질적인 보수적 태도도 문제지만 도밍고라는 이름이 지닌 마케팅 가치를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오페라계 생태계와 시장이 허약한 것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