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 응옥 친의 모습. 베트남 매체 VNEXPRESS 보도 화면 캡처

베트남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형제가 39년 만에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 고문당하던 중 감옥에서 생을 마친 남동생을 대신해 일흔여덟의 형이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구했던 삶을 털어놨다.

쩐 응옥 친과 쩐 쭝 탐 형제의 비극은 1980년 시작됐다. 그해 1월, 마을 당 대표였던 추 반 꽌이 갑작스럽게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다. 이 마을 평범한 농부였던 형제는 이웃들과 함께 현장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형제를 포함한 마을 사람 4명은 꽌 대표를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됐다.

영문도 모른 채 용의 선상에 오른 형제는 같은 해 4월 살인 혐의로 기소된다. 이어진 감옥 생활은 끔찍했다. 하루에 두 번씩 심문을 받았는데, 그 외 시간에는 늘 발이 묶여 있었다. 고문도 수없이 당했다. 끊임없는 구타와 함께 자백을 강요받았다.

그러던 중 동생 탐은 숨졌다. 끔찍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은 것이다. 탐의 아들 쩐 반 만은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아버지가 체포된 후 2개월 뒤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곧바로 감옥으로 찾아갔지만 경찰은 ‘늦게 와서 이미 시신을 묻었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동생이 죽은 후 친은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고 숨 쉴 구멍만 겨우 뚫린 작은 독방에서 생활했다. 지옥 같은 하루가 계속되자 결국 친은 하지 않은 일을 자백한다. 1년여 지난 1981년 5월이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경찰은 현장 검증을 위해 친을 끌고 가 범행을 재연하라고 강요했다. 무고했던 친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경찰은 그의 자백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검증을 마무리했다.

친의 수감생활이 시작됐다. 억울한 옥살이였지만 강제 심문을 당하지도, 아픈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의 허위자백을 눈치챈 다른 수감자들은 사실을 밝히라며 설득했지만,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2년이 흐른 1982년 10월, 검찰은 친을 석방한다. 진범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용의자로 친과 함께 붙잡혔던 경찰관 응웬 딘 키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공산당 가입을 원했던 키는 고위 당국자에게 이를 부탁한다. 그러나 마을 당 대표였던 꽌은 그의 당내 활동을 반대했다. 키가 마을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꽌과 키는 갈등을 빚었고 이 일은 살인으로 이어졌다. 당시 키는 친형제와 함께 용의자로 지목됐으나, 그와 관계를 갖던 여성이 ‘키가 아닌 다른 3명을 조사해야 한다’는 투서를 경찰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진범인 키는 이듬해 6월 사형을 선고받았다. 친은 자유를 얻었으나 지난 아픔은 회복할 수 없었다. 수사 당국이 “친이 결백하다는 확증이 없다”며 사과나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친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주변 사람들의 차별과 눈총을 받았고 결국 그의 가족들은 마을을 떠나야 했다.

친은 힘들어하는 가족과 떠난 남동생을 위해 길어질 싸움을 결심했다. 공식적인 발언을 피하는 수사 당국에 사과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이들의 사연이 빈푹 변호사 협회 소속 응웬 반 훙에게 전해졌다. 훙 변호사는 사건 기록을 고등기관에 전달했고, 베트남 법무부 기관지에 이 이야기를 보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베트남 변호사 협회가 직접 나서 최고 인민 법원에 ‘무고하게 누명을 쓴 희생자들에 대한 정의를 요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같은 노력의 결실은 지난 9일(현지시간) 맺어졌다. 사건 발생 39년 만이었다. 빈푹 검찰청은 살인 누명을 썼던 형제와 또 다른 용의자 콩 반데(98)에게 공개 사과했다. 친은 “드디어 고통이 끝났다는 생각에 행복해서 울었다”며 “이제야 편안한 맘으로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소회를 밝혔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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