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커피 몇 잔 값으로 온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월드비전 설립자 밥 피어스의 딸 메릴리 피어스 던커 인터뷰

메릴리 피어스 던커(69)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슬픔 그리움 추억 쓸쓸함 아픔…. 그녀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는 털어놓듯이 말했다.

“사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아요.”

메릴리의 아버지는 월드비전 설립자 밥 피어스 목사다. 지난달 30일 서울 영등포구 월드비전 한국본부를 방문한 그녀를 만났다. 6번째 한국 방문이었다. 그녀에게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물었다. 메릴리는 공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 뛰어가 품에 안긴 일을 떠올렸다.

“저를 안아주시는 포근한 감촉. 저의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팔. 그리고 어렴풋이 풍기는 냄새. 그게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입니다.”

메릴리 피어스 던커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고 고백했다. 송지수 인턴기자

아버지의 냄새는 동양, 아마도 한국의 냄새일 거라고 어린 메릴리는 짐작했다.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뿐이었다. 인터뷰 내내 밝게 웃던 그녀의 표정이 잠시 쓸쓸해졌다.

“아버지와 정말로 함께했던 기억은 없어요. 가족이 함께 앉아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산책하는 그런 기억 말이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아버지가 나와 아시아의 어린이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참 뿌듯했고 제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게 자랑스러웠지만, 사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많지 않네요.”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 월드비전과 그녀는 동갑내기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진 1950년 여름 미국 서부에서 메릴리가 태어났다. 그해 봄 방문했던 밥 피어스 목사는 갓 태어난 딸을 두고 다시 유엔군의 종군기자로 한국에 갔다. 그곳에서 죽어가는 전쟁고아를 만났다. 아이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월드비전의 출발점이었다.

“저나 월드비전이나 모두 아버지에겐 갓난아기였지요. 저는 평화로운 캘리포니아에서 어머니의 돌봄을 받으며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안전하게 학교를 다녔지만, 한국에서 월드비전의 후원을 기다리는 수많은 아기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월드비전이 저보다 훨씬 더 손이 많이 가는 아기였어요, 아버지에겐.”

아버지는 1년에 열 달을 외국에서 보냈다. 한국에선 한경직 목사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옷 밀가루 석탄 같은 구호품을 나눠주었다. 보육원 모자원을 세우고 학교를 도왔다. 필리핀 인도 등 수많은 아시아 나라에서 비슷한 활동을 했다.

6.25 전쟁 당시 사과를 받아든 한국 전쟁고아들.

집에 돌아가서도 편히 쉬진 못했다. 미국 전역을 다니며 자신이 직접 촬영한 아시아의 상황을 소개하고 “이 아이들을 살리자”고 호소했다. 방송국에 출연하고 집회를 열었다. 메릴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가 바빴으니 저는 원래 그런 줄 알았어요. 저에겐 9살 많은 언니 셰런이 있었습니다. 언니는 달랐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빠를 빼앗긴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니는 많이 힘들어했어요.”

1968년이었다. 18세 셰런은 아버지가 아시아의 어느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전화를 걸었다. 국제전화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아빠, 집으로 와줘.”
“그럴 수 없단다, 아이야. 아빠는 하나님과 약속했단다. 내가 그분의 잃어버린 어린 양을 돌볼 테니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돌봐주실 거야.”

1년 뒤 셰런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가 설립한 구호단체를 통해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가족은 깨어지고 그도 지쳐버렸다. 월드비전도 그에게 휴식을 권했다. 이미 신경쇠약에 걸려 있던 밥 피어스는 스위스의 한 재활원에 들어갔다.

그는 퇴원한 뒤 다시 어린이를 돕는 일을 시작했다. 가족의 고통은 그대로였다. 아내 로레인은 남편과의 결별을 통보했다. 별거 생활은 밥 피어스가 숨을 거두던 1978년까지 8년간 지속됐다.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얘기해 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메릴리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제가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였어요.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러시는 거예요. ‘얘야, 아빠는 이제 집으로 간다(Sweetheart, I am going home).’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했죠. 아버진 집에서 저랑 통화 중인데 집으로 간다니. 아버지는 백혈병에 걸렸던 겁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행복하게 들렸어요.”

집으로 간다는 말은, 큰딸 셰런의 부탁에 이제서야 답한다는 의미였을까.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순간을 매릴리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기억했다.

“아버지 옆에 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둘러앉아 함께 식사했어요. 그날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깨어진 가족 관계를 두고 세상을 떠나길 원치 않으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를 위해 기도해 오셨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회복시키신 그 순간을 나와 동생이 목격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가족 만찬 3일 뒤 밥 피어스는 큰딸이 기다리는 하늘나라로 갔다. 64세였다. 부친의 마지막 순간을 얘기하는 메릴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혹시 아버지를 빼앗아 간 한국의 또래 아이들이 밉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아뇨, 아뇨. 아버지가 겪은 문제는 그 시대의 문제였어요. 당시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했고 동시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통받는 이들을 필름에 담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수많은 집회를 통해 그 참상을 전달했습니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선구자였던 것이죠. 문제는 균형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일을 처음으로 시작했고 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불태우다 결국 육체도 감정도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그때 백혈병이 찾아온 것이죠.”

인터뷰하던 메릴리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앉은 월드비전 직원과 취재진에 당부했다.

“여러분, 여러분은 부디 일과 삶의 밸런스, 균형을 지켜주세요. 지금은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와는 다릅니다.”

밥 피어스의 아내, 메릴리의 모친 로레인 여사는 평생 비행기 타기를 무서워했다. 메릴리는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를 다니며 하나님의 일을 하게 부르신 남자와 비행기를 무서워하고 집과 마을, 교회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조용히 기도하는 여자를 부부로 맺어주셨다”고 말했다.

로레인 여사는 월드비전 창립 50주년이었던 2000년 한국을 찾았다. 당시 중풍으로 말년을 보내던 한경직 목사를 만났다. 로레인과 한 목사 두 사람 다 휠체어를 탄 채였다. 로레인은 11년 뒤 94세로 남편과 큰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밥 피어스의 시대는 거인이 필요한 시대였다. 가족의 희생을 알아주는 공동체도 없었고, 아픔을 내놓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메릴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다.

“지금은 정보과잉의 시대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검색만 하면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너무 많으니 해결할 수 있을지 확신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마 69년 전 한국에 왔던 아버지도 마찬가지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는 없을지라도, 누군가 한 사람을 위해 뭔가 작은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단 한 명의 어린이에게 변화된 삶을 선물하고 싶다는 후원자들을 통해 월드비전은 지금까지 수백만 어린이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만큼 세상을 바꾸어 왔습니다. 이젠 과거처럼 큰 희생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한 달에 커피 몇 잔 값만 아끼면 어린이 한 명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조약돌 하나를 던지면 물결이 사방으로 번지듯 한 명의 어린이가 변화하면 온 세상이 바뀔 수 있습니다.”

눈물을 거두고 열변을 토하는 그녀에게서 밥 피어스 목사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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