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된 차량과 접촉사고를 낸 다음 자기 차를 사고 현장에 방치했다면 연락처를 남겼더라도 ‘뺑소니’가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추가 사고를 막기 위해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기 차량을 치우는 조치까지 했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3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도로교통법 위반(사고후미조치·음주측정거부)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해 사고후미조치 부분에 대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고 11일 밝혔다.

A씨는 지난해 2월 경기도 용인의 골목길에서 술에 취한 채 화물차를 운전하다가 왼쪽에 주차된 차량 앞부분을 들이받았다. 사고가 난 곳은 차량 2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도로였다. A씨는 자신의 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차를 그대로 세워놓은 채 귀가했다. A씨가 한 조치는 이름이나 주소 없이 전화번호만 적은 종이를 자신의 차 유리창 앞에 둔 것이 전부였다. A씨는 사고 이후 자택으로 출동한 경찰의 음주 측정 요구에도 불응했다.

재판 쟁점은 도로교통법 상 ‘주·정차된 차만 손괴한 것이 분명한 경우’에 있어 사고 후 조치의 범위였다. A씨는 피해가 경미해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남긴 것만으로 충분하고 도로교통법상 교통사고가 발생한 경우에 따른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1심은 A씨가 사상자를 구호하는 등 교통사고 발생에 따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 징역 5년 이하 벌금 1500만원 이하로 무겁게 처벌하는 도로교통법 148조를 적용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은 그러나 A씨가 ‘피해자에게 인적사항을 제공하지 않은 경우’에만 해당한다고 보고 2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 또는 과료에 가볍게 처벌하는 도로교통법 156조를 적용했다. 성명 등 기재없이 전화번호를 남긴 것이 인적사항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판결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대법원은 A씨에게 인적사항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사고 후 조치 의무가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사고가 발생한 도로에 다른 장애물이 없었더라도 가해차량 때문에 다른 차들이 도로를 다닐 수 없게 됐다면 피고인이 사고 현장을 떠나면서 안전하고 원활한 교통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이 단순히 피해자에게 인적사항을 제공하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사상자 구호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볼 여지가 있다”며 사건을 원심으로 파기환송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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