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비' 서진혁 선수 [그리핀 제공]

‘중국으로의 강압 이적 의혹’ 사건 피해자로 지목된 ‘리그오브레전드(LoL)’ 프로게이머 ‘카나비’(게임상 닉네임) 서진혁(19)군이 소속 팀 지시로 불법 소지가 있는 에이전시 계약을 맺은 사실이 확인됐다. 이 에이전시는 사실상 해당 팀과 선수를 동시에 대리하고 있어 ‘쌍방대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현행법을 위반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축구·야구계에서는 이해충돌 우려가 있는 에이전트의 쌍방대리 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10대 선수인 서군이 팀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적을 강요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진 데에는 이런 불공정 계약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국민일보는 17일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실로부터 서군과 e스포츠 에이전시 키앤파트너스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를 입수해 양자의 계약 관계를 확인했다. 서군의 에이전시 계약 사실이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계약서에 따르면 키앤파트너스는 서군이 계약할 게임 팀을 물색하고 계약 조건을 검토·협상하는 독점적 권한을 갖는다. 계약 체결도 독점적으로 수행한다. 그 대신 선수에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게 돼 있다.

서진혁군과 키앤파트너스와의 에이전시 계약서[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실 제공]

문제는 키앤파트너스가 사실상 서군이 소속돼 있는 게임 팀 그리핀의 법률 대리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키앤파트너스는 법무법인 비트와 대표 및 구성원, 사무실이 동일하다. 그런데 비트는 서군이 지난 5월 중국의 징동게이밍(JDG)에 1년6개월 임대를 가는 과정에서 그리핀 측에 법률 자문을 했다. 지난달 서군의 JDG 완전 이적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는 그리핀 측을 대신해 이적 합의서도 작성했다. 사실상 한 법무법인이 선수와 소속 팀을 동시에 대리하고 있는 셈이다.

쌍방대리를 법에서 금지하는 이유는 양측 이익이 충돌할 경우 대리인이 한쪽 편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쪽은 그만큼 피해를 보게 된다. 이 때문에 대한축구협회도 에이전트의 쌍방대리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는 점을 표준중개계약서에 명확히 하고 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도 ‘선수 이익과의 충돌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대리인 규정에 명시해 놓았다. 업계 상황에 밝은 한 변호사는 “에이전트가 변호사라면 쌍방대리는 변호사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채율의 정다은 변호사는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신뢰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는 수임을 제한하자’는 게 변호사법의 취지”라며 “변호사 윤리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키앤파트너스 측은 “쌍방대리 금지는 이 사안에 적용될 수 없는 법리”라고 해명했다.

'카나비 사태' 일지

계약 조항이 불공정하다는 지적도 있다. 계약서 2조 3항에는 ‘에이전트는 독점 에이전트 권한을 행사하며, 그 과정에서 선수의 이름과 계산으로 계약을 할 수 있다. 단, 에이전트는 선수가 사전에 명시적으로 의사표시한 것과 반하는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다’고 돼 있다. 이 조항에 대해 프로스포츠 업계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에이전트가 계약 상황을 사전 고지할 의무는 없고 선수가 거부할 권리만 있다”며 “사전 고지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계약 내용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으면 선수가 거부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강조했다. 이 변호사는 또 “에이전트가 입단 팀과 계약 조건까지 전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은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며 “계약 조항을 놓고 법적 분쟁을 할 경우 공정거래법이나 민법에 의해 계약이 무효로 판단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키앤파트너스 측은 “선수들의 의사를 최우선적으로 존중해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계약 체결 과정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계약서에 적혀 있는 계약일은 지난 5월 18일이다. 서군과 그의 모친은 에이전시 계약서에 7월 뒤늦게 서명했다. 서군 측 주장에 따르면 당시 그리핀의 김모 단장은 해당 계약서를 ‘임대 관련 서류’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서군은 에이전시 계약을 맺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다. 에이전트는 서명 당시 자리에도 없었다. 소속 팀에서 선수의 에이전시 계약을 주선한 것이다.

중국 이적 과정 강압 논란이 불거졌던 프로게이머 서진혁이 에이전시와 전속 계약을 맺고도 도움을 받지 못했던 사실이 확인됐다. 이른바 '카나비 사건'을 폭로한 김태호 전 감독이 그리핀에서 활동할 당시 모습 [라이엇게임즈 제공]

서군은 이적 추진 과정에서 에이전트로부터 법률 조력을 전혀 받지 못했다. 소속 팀은 최근 500만 위안(8억3000만원 상당)의 이적료로 초특급 유망주인 서군의 중국 이적을 추진하면서 구체적인 계약 진행 상황을 서군과 공유하지 않았다. 서군은 사실상 팀 지시에 따라 원치 않았던 장기간의 이적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계약은 강압 이적 의혹이 불거지자 파기됐다.

서군은 최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에이전시 계약과 관련해 명확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며 “이적 논란이 불거진 지난 9월 이후 뒤늦게 에이전시 계약서를 발견해 그런 계약을 맺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주장했다. 정다은 변호사는 “미성년자인 서군의 계약 체결 권한을 독점적으로 위임받은 에이전시가 ‘강압 이적’ 논란이 불거졌는데도 나서지 않았다”며 “계약상 채무불이행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키앤파트너스 측은 “그리핀 측이 계약 당시 서군 등에게 선수 보호를 위한 에이전시 계약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했다”고 해명했다. 또 JDG 이적 과정에서 조력을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강압 이적 의혹은 최근 보도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며 “선수가 도움을 요청해야 관련 업무를 진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e스포츠 에이전시 관계자는 “에이전트는 기본적으로 선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대리인”이라며 “키앤파트너스는 에이전트의 역할보다는 철저히 팀 입장에서 움직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국민일보는 조규남 당시 그리핀 대표 및 김 단장 등과 모두 접촉했지만 모두 답변을 거부했다. 조 전 대표는 강압 이적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하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연 1000억원 규모로 성장한 e스포츠는 프로선수 평균 연령이 20.8세로 어린 반면 평균 연봉은 1억7558만원(지난해 기준)일 만큼 돈이 몰리는 산업이다. 서군도 JDG에 1년 6개월 임대 활동을 하면서 2억 원을 받기로 했었다. 다만 계약을 둘러싼 업계 관행이 투명하게 정립되지 않아 문제로 지적돼 왔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17일 오전 대구 육군 제2작전사령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의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 하고 있다. 2019.10.17. 뉴시스

하 의원은 “그리핀이 친분 있는 법무법인을 선수 대리인으로 세워놓고 이적 계약을 주무르려 했던 것 아니냐. ‘묻지마 대리인’을 통해 부당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게 하고 거액의 이적료를 챙기는 기형적 수익 구조가 e스포츠에 기생하고 있다”며 “이 사건의 본질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노예계약’이기 때문에 검찰 수사로 조속히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동성 이다니엘 윤민섭 기자 the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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