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가 ‘양승태 사법부’에서 각종 법관 인사불이익 문건을 작성한 인사심의관 출신 법관에게 “법정 증언을 하라”는 취지의 승낙서를 내줬다. 이 법관은 “법정 증언할 내용이 공무상 비밀에 해당한다”며 행정처의 허락이 우선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행정처의 증언 승낙에 따라 ‘사법농단’ 사건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법관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관련한 내밀한 내용들이 법원에서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19일 국민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행정처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과 관련해 증인으로 채택된 노재호 서울남부지법 판사의 법정 증언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승낙서를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부장판사 박남천)에 전달했다. 20일 증인신문이 예정돼 있던 노 판사는 지난 13일 재판부에 “형사소송법 147조에 따라 (자신의) 신문사항이 공무상비밀에 해당한다”며 증인신문이 어렵다고 신고했다.

노 판사는 “행정처의 판단을 받아야 증인신문을 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오히려 법정에서 증언할 의사가 있어 선제적으로 한 조치였다”고 국민일보에 밝혔다. 다만 검찰은 증언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고 앞서 반박 입장을 냈다. ‘사법농단’ 사태의 공소유지 과정 중 핵심은 법관 블랙리스트 문건이 만들어진 배경, 윗선 관여 여부에 대해 밝히는 것이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월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 취재진 질문에 아무 말 없이 건물로 들어서고 있다.

오랜 수사 뒤 법관 블랙리스트 문제를 법정까지 끌고 온 검찰의 입장에서는 노 판사의 공무상비밀 주장이 중요한 관문이었던 셈이다. 행정처가 노 판사의 주장을 검토하는 가운데 검찰은 ‘국가에 중대한 이익을 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증인신문의 승낙을 거부할 수 없다’는 형소법 조항을 제시했다. 국익을 해하는 것과 노 판사에 대한 증인신문 내용은 무관하다는 취지였다.

검찰은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추명호 전 국정원 2차장의 불법사찰 사건 공판에서 증언했던 전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국정원장의 허가가 있어야 법정 증언이 가능한데, 이때에도 국가의 중대 이익을 해치는 경우 이외에는 허가를 거부할 수 없다. 검찰 관계자는 “노 판사의 증언이 없으면 실체적 진실 발견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판사는 증인신문을 비공개로 진행하거나, 공개하더라도 방청을 돕는 ‘실물화상기’를 쓰지 말아달라는 의견도 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작성한 인사자료가 재판부 외에 언론·방청객에게 노출되는 일을 꺼린 것으로 풀이된다. 검찰은 “재판연구관 보고서 등 행정처의 다른 대외비 문건 증거들도 공개됐었다”며 “인사자료라 해서 달리 보는 건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20일 공판기일에서 노 판사의 증인신문 공개 여부를 결정한다.

노 판사는 2015년 2월~2017년 2월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서 인사 1·2심의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윗선 지시를 받고 법관 블랙리스트 문건으로 불리는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와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방안’ 등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검찰은 ‘사법농단’ 공소장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등은 직권을 남용해 사법행정에 비판적이거나 ‘튀는 판결’로 사법행정에 부담을 준 판사들에 대한 징계 수단으로 인사심의관 노재호 등에게 인사불이익 처분을 검토하고 그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하게 했다”고 적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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