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예방 생명지킴이로 활동 중인 박태규(왼쪽 두 번째)씨와 임하영(세 번째)씨가 지난달 2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2019 생명지킴이 교육 한마당'에 참석한 후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아흔 살 할아버지가 와서 ‘자식들과 연락 끊긴지 오래고 더 사는 게 의미가 없다. 집에 끈, 약을 다 사뒀다”고 하는데 숨이 턱 막히더군요. 떨렸지만 교육받은대로 물었죠,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광주에 사는 박태규(68)씨는 4년 전 ‘자살예방 생명지킴이’가 되고 맡은 첫 상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씨는 그날 할아버지 집에 찾아가 자살 도구를 모두 치우고 그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들어줬다. ‘적어도 오늘은 죽지 마시라’ 손가락을 걸고 약속도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연락해 이 약속을 반복했다. 박씨는 “할아버지가 입으로는 ‘죽을 준비가 됐다’고 하는데 눈은 ‘살려 달라’고 하고 있었다”며 “연락을 이어가자 그는 어느새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최근 유명 연예인들이 잇따라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기자는 지난달 26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린 ‘2019 생명지킴이 교육 한마당’에서 자살예방 생명지킴이 교육을 듣고, 이전부터 생명지킴이로 활동해 온 시민 6명을 만났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자살예방센터는 2012년 제정된 관련법에 따라 자살 위험에 처한 사람의 신호, 징후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생명지킴이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 교육을 들어 생명지킴이가 된 시민은 190만명에 달한다. 이들은 주변사람 중 자살 위기자를 발견하고 전문 상담기관에 연결해주는 활동을 한다.

경기도 광명시에서 생명지킴이로 활동하는 김동주(59)씨는 3년 전 60대 할아버지 집의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추석 당일 동주씨는 평소 자살 징후를 보여 관리 중이던 할아버지에게 연락했지만 닿지 않았다. 동주씨는 “할아버지 집에 갔더니 이미 음독한 후 쓰러진 상황이었고 바로 응급실로 이송했다”고 말했다. 이후 깨어난 할아버지는 김씨에게 “명절인데 너무 외로웠다. 고맙다”고 전해왔다.

기자가 지난달 26일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생명지킴이교육 '이어줌人 직장인' 수업을 들은 후 받은 수료증. 관련 수업 일정은 중앙자살예방센터 홈페이지에 게시돼있다.

자살 징후를 포착해내는 게 생명지킴이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임하영(60)씨는 “심리부검 결과를 보면 자살자 10명 중 8명이 행위 전 ‘나를 좀 살려주세요’ ‘관심을 가져주세요’라는 신호를 주변에 무수히 던진다”며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아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주씨는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도 무의식적으로 생명이 소중한 걸 알아서 자살 도구를 아무거나 쓰지 않는다. 새 도구를 사고, 자살 장소도 여러 번 탐문한다”고 말했다. 주변인이 이런 행동을 보이거나 ‘죽고싶다’ ‘외롭다’는 말을 자주 한다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인관계 정리하기’ ‘급격한 업무 능력 저하’ 등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살의 경고 신호에 해당한다.

주변인에게 자살 경고 신호가 보이면 그에게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들어만 줘도 효과는 크다. 임씨는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혹시 자살을 생각 중이냐’고 물으면 흥분시킬 수 있어 위험하다고 많이들 오해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오히려 ‘드디어 누군가가 내 어려움을 알아주는구나’ ‘나도 이제 살 수 있겠다’며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임씨는 “그들이 진짜 원하는 건 죽음이 아니다. 어려움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 죽음을 잘못 선택했던 것”이라며 “이들에게 심리적 지지가 필요한 이유”라고 했다.

고양시에 사는 김영실(53)씨도 고민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한 여고생을 살렸다. 김씨는 “말을 걸었더니 처음에는 쭈뼛대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가정불화, 외모 문제에 시달려 죽을 날짜를 정해놨다며 엉엉 울더라”며 “정기적 상담 이후 건강해졌고 지금은 대학생이 됐다”고 말했다. 영실씨는 사람을 ‘압력밥솥’에 비유했다. “압력이 가득 차 터지려는 순간 작은 구멍을 통해 ‘칙칙’ 김이 빠져나가잖아요? 사람도 그렇게 위험한 순간을 넘깁니다. 사소한 계기로 ‘오늘’ 죽기로 했던 계획을 내일로, 모레로 미루다보면 어느새 살 이유를 찾게 되죠.”

생명지킴이 김영실(왼쪽 세 번째)씨가 지난 5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생명지킴이 알리기 및 자살예방 캠페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연예인 설리, 구하라씨의 죽음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며 생명지킴이들은 안타까워했다. 권미숙(68)씨는 “이들도 죽기 전 수없이 신호를 보냈을 것”이라며 “주변에 누군가 징후를 알고 도움을 줬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박태규씨는 “특히 구하라씨는 얼마 전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고 친한 친구(설리)도 극단적 선택을 해 고위험군에 속한다”며 “아무리 ‘잘 살아 보겠다’며 겉으로 괜찮은 척을 해도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고위험군은 집에 혼자 두지 말고 주변인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했다.

생명지킴이들은 ‘요즘이야말로 주변을 잘 살피고 관심을 기울여야할 때’라고 거듭 말했다. 권씨는 ‘만약 지금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죽지 마세요. 당장은 살 이유가 없는 것 같아도 하루하루를 버티다보면 ‘죽지 않길 잘했다’고 안심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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