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출판 물류업체인 배본사 '북스로드'가 화재로 전소됐다. '이노북' 출판사 류인호 대표 제공

출판사 50여곳의 책 50만권을 보관한 물류창고가 불에 타 영세한 1인 출판사 등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구제책이 마땅치 않은 가운데 향후 유사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출판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오전 5시 경기도 파주 월롱면 검바위길에 위치한 배본사 ‘북스로드’의 150평 크기의 창고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 북스로드 이모(43) 대표는 창고 2층에서 경보를 듣고 휴대전화도 챙기지 못한 채 몸만 빠져나왔다. 불은 창고를 전소시키고 오후 1시가 돼서야 진화됐다. 배본사는 출판사들의 책들을 보관하다가 서점으로 출고시키는 중간유통업체다.

사고 소식을 접한 출판사 관계자들은 현장에서 터만 남은 창고와 재가 된 출판물만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전소된 책 사진을 온라인상에 게재하며 피해 상황을 공유했다. 직접 소방서와 경찰서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런 사연은 몇몇 관계자들이 SNS에 사연을 올리며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전소된 도시 50만권이 물에 젖은 채 창고 터에 쌓여있다. 매씨킹 출판사 제공

‘옥탕방 프로덕션’ 이관형(35) 대표는 “우울하고 허탈하다”는 심경을 표했다. 전자책을 전문적으로 제작해왔던 그는 최근 가장 애착이 큰 작품을 종이책으로 찍어 지인들에게 선물한 뒤 서점에서 판매할 1300부를 이곳에 보관했다. 이 대표는 “혼자 원고와 편집, 디자인까지 마쳤다”면서 “책들이 서점에 배송되기 직전에 일이 벌어졌다”고 토로했다.

역시 직접 쓰고 제작한 책 1128부를 잃었다는 ‘도서출판 OBJMEDIA’의 김찬웅(56) 편집장은 “책이 불에 탔는데 어느 작가가 마음이 무너지지 않겠나”라며 참담한 심정을 전했다. 그는 배본비가 저렴한 이 업체에 많은 소규모 출판사들이 책을 맡겼다고 설명했다. 김 편집장은 “1인 출판사는 중대형 출판사와는 다르다. 중대형 출판사들이 만들지 않는, 돈이 안 되는 책에 전력투구하기도 한다”며 “이런 출판사들이 이번 화재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문을 닫으면 그만큼 출판계의 다양성이 줄어든다”고 안타까워했다.

배본사도, 영세 출판사도 보험은 그림의 떡…수십억 보상 막막

북스로드에 따르면 화재로 인한 총 피해액은 34억원쯤이다. 책 정가의 20~30% 정도인 제작단가만 따진 액수다. 규모에 따라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피해를 봤다. 그러나 북스로드는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았다. 이곳과 계약을 맺은 출판사들 역시 대부분 보험이 없었다. 당사자들은 이런 상황이 “영세한 출판사와 배본사 사이에서 빈번하다”고 입을 모았다.

‘남해산책출판사’ 김조숙(55) 대표는 “새 배본사를 구하다 보니 화재보험에 가입된 배본사들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며 “보험 가입을 해도 보상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김 대표는 “화재에 취약한 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창고는 높은 보험료를 내지만 보상액은 적다”며 “그 정도 보상을 받자고 15만원 남짓한 기본 배본비도 부담스러운 작은 출판사들이 매달 화재보험료를 내기는 힘든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북스로드 이 대표는 “대형 배본사들은 계약을 맺을 때 출판사 자체적으로 보험을 들도록 요구하거나, 보험료를 기본 배본비에 포함해 비싸게 받는다”면서 “소규모 출판사들이 이런 대형 배본사들과 계약을 맺기 힘들어 결국 자신들처럼 영세한 소형 업체들과 계약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가로 책을 1만원에 팔면 출판사에게 남는 마진이 3000원 정도인데 한 달에 몇 권이나 팔릴지 모른다”며 “안정적인 수입을 기대하기 힘든 출판사가 매달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배본비에 보험료까지 감당하며 사업을 이어가기 힘든 현실”이라고 말했다.

불에 탄 채 방치된 책들. 282 출판사 제공

피해 출판사들은 관계기관과 상담해봤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한국출판문화진흥원으로부터 “당장 드릴 수 있는 직접적인 지원이 없다. 내부에서 논의해보겠다”는 답만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재기할 방법이 없는 출판사들은 관련 기관과 시민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한다. 한 출판사 대표는 “시나 도 차원이 아니면 구제는 어려워 보인다”며 “출판사들도 사업 복구가 급하겠지만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모을 때가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로 출판유통과정의 취약함이 드러난 만큼 구조적인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아 퍼블리싱’의 안소정(33) 대표는 “출판사들이 대형서점과 계약을 맺으려면 배본사가 꼭 필요한데 이런 사고에 전 재산을 잃어도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점은 출판계에 치명적인 약점”이라며 “이같은 문제에 해결책이 없으면 업계 전체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인다”고 우려했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연합뉴스에 “영세 출판업체들이 연쇄 도산할 위기에 처해 있는 만큼 정부 기관과 지자체들이 해당 업체의 도서를 사주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라며 “과거 대규모 출판 도매상의 부도로 영세 출판업체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렇게 도운 사례도 있다”고 제안했다.

박실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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