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현지시간) 최소 170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란 수도 테헤란을 이륙한 직후 추락한 우크라이나 여객기의 잔해가 테헤란 외곽에 흩어져 있는 모습.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정부가 자국 항공사 여객기를 이란군이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도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이를 함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국 조사팀이 사고기가 추락한 이란 현지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이란 정부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올렉시 다닐로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방위위원회 사무국장은 13일(현지시간) 미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이란 수도 테헤란 인근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 국제항공(UIA) 752편 참사에 대해 “우리는 미국이나 캐나다보다 먼저 사고기가 이란 미사일에 맞아 추락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당시 상황에서 신중한 외교 행보를 걸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사실을 공개하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닐로프는 “자국 조사관들이 이란 측에 책임을 지울 수 있는 확실한 증거들을 테헤란 현지에서 수집하기 위해서는 이란 측 협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이란을 향한 날선 비판을 자제했다”고 말했다. 의도적으로 조심스러운 외교 노선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WP는 “이란의 격추 시인 발표 직후 우크라이나는 미사일 파편에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여객기 잔해 사진을 공개했다”며 “하루 전에 촬영된 사진이었다. 우크라이나가 이란군의 피격 실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전했다.

참사 직후 미국과 영국, 자국인 다수가 희생된 캐나다는 사고기가 이란 미사일에 격추됐다는 주장을 제기했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들 국가에 정보 공유를 요청하면서도 별다른 입장 발표를 내놓지 않았다. WP는 “이란이 피격 사실을 인정한 뒤인 12일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은 엄숙했지만 의기양양했다”고 전했다. 그는 연설에서 “우리는 이번 추락 사고의 진실을 찾아내 결론을 도출한다는 한 가지 목표 아래 과도하게 흥분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미 외교·안보 싱크탱크 윌슨 센터의 니나 얀코비츠 연구원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치 초보임에도 우크라이나의 국익을 지키려면 어떻게 반대 세력에 접근해야 하는 지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WP는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판단 덕에 이번 사건은 2014년 7월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 추락 사건과 달리 조사가 조기 종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네덜라드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로 향하던 이 비행기는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親) 러시아 분리주의 반군의 교전 지역 상공을 통과하던 중 추락해 탑승객 298명 전원이 숨졌다. 국제 조사팀은 사고기가 러시아가 반군에 제공한 미사일에 피격됐다고 잠정결론 내렸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참사에 대한 책임을 전부 회피하고 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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