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로이터연합뉴스

스위스 암호장비 업체 크립토AG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연계 의혹 보도로 스위스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유지해온 ‘중립국’으로서의 명성이 흔들리고 있다. 스위스 전직 장관들과 의원들이 ‘스파이 스캔들’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현지 보도도 나왔다.

영국 BBC는 16일(현지시간) 크립토AG 스캔들의 지저분한 세부 내용들이 폭로된 후 스위스 현지에선 자국의 중립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언론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현지 신문 방송 등에선 자국의 중립국으로서의 명성이 산산 조각났다는 문구가 통용되고 있다. 전세계에 중립을 자처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이중에서도 스위스만큼 중립성을 국가의 핵심 정체성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국가는 없었기에 폭로의 후폭풍이 더 거세다.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다수 제기되고 있다. 스위스 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 차원의 조사위원회 설치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스위스 당국도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지휘는 전직 연방판사인 니클라우스 오버홀처가 맡았다. 크립토AG 의혹에 대한 종합 보고서는 오는 6월까지 제출할 예정이다.

크립토AG는 냉전 시기부터 최근까지 전세계 120개 이상의 정부에 암호장비를 팔았다. CIA와 옛 서독 정보기관인 BND과 이 장비를 교묘하게 조작해 각국의 기밀정보를 몰래 빼돌렸다는 것이 지난 11일 폭로 보도의 골자였다. BBC는 미국과 이란의 사례를 들어 스위스가 내세우는 ‘중립성 신화’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스위스는 지난 30년간 중립국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미국에서는 이란의 이익을, 이란에서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미국의 대(對) 이란 제재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결과를 경감하기 위해 미국과 인도주의적 원조를 열어주는 방향의 물밑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폭로로 암호장비들이 중립국 스위스에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믿음 속에 이란 등 각국에 팔려나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은 문제의 장비를 이용해 적국을 엿들었다.

스위스 전직 장관 및 의원들이 스파이 스캔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스위스 신문 ‘존탁스차이퉁’ 등은 이날 카린 켈러 주터 스위스 법무장관이 지난해 12월 연방정부에 이 같은 내용이 실린 문건을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문건에 따르면 아르놀트 콜러 전 스위스 법무장관은 연방 경찰이 1990년대에 크립토AG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카스퍼 필리거 전 국방장관이 크립토AG 이사 한 명과 접촉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문은 이외에도 수년 전 크립토 이사회 의장을 맡았던 연방 의원들도 이번 스캔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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