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곳에서 제작보고회를 연지 1년이 돼 가네요. 그만큼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긴 생명력을 가지고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돼 기쁩니다. 참 기분이 묘하네요.”

아카데미(오스카)상 4관왕을 거머쥐며 한국영화 101년사에 새 역사를 쓴 봉준호 감독은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그는 “그동안의 많은 경사들이 있었다. 영화사적 사건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 자체가 기억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배우들의 아름다운 연기와 스태프들이 장인정신으로 만들어낸 장면들, 그 안에 들어간 저의 고민들을 기억해주시라”고 말했다.

‘기생충’은 올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휩쓸며 최다인 4관왕을 거머쥐었다. 외국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건 사상 처음이다. 아울러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거머쥔 건 1946년 ‘잃어버린 주말’, 1955년 ‘마티’에 이은 역대 세 번째다.

아카데미 시상식 전 작품을 알리고 홍보하는 ‘오스카 캠페인’만 장장 6개월간 진행됐다. 봉준호 감독은 “다른 거대 스튜디오에 훨씬 못 미치는 예산이었지만 우리는 똘똘 뭉쳐 열정으로 뛰었다. 송강호 선배님과 함께 코피를 흘릴 정도로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창작자들이 창작에서 벗어나 많은 시간을 들여 캠페인을 하는 게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 적도 있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작품을 깊이 있고 밀도 있게 검증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상했다.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생충' 기자회견에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오른쪽부터), 봉준호 감독, 배우 송강호,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이 박수치고 있다. 연합뉴스

평소 롤모델로 꼽았던 마틴 스콜세이지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화도 들려줬다. 봉준호 감독은 “오늘 아침에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이 편지를 보내오셔서 영광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마지막 문장에 ‘그동안 고생했고 이제 쉬라. 대신 조금만 쉬어라. 나를 비롯한 모두가 당신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으니’라고 적혀있더라. 감사하고 기뻤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2017년 ‘옥자’를 끝내고 이미 ‘번아웃 증후군’ 판정을 받았었다. 그러나 ‘기생충’이 너무 찍고 싶어서 영혼까지 끌어 모아 작품을 완성했다. 촬영보다 긴 캠페인까지 소화했다. 거슬러 생각하면 긴 세월인데 행복하게 마무리된 것 같아 기쁘다. 제가 노동을 많이 한 건 사실이다. ‘좀 쉬어볼까’란 생각도 있는데 스콜세이지 감독이 쉬지 말라고 하셔서 (못 쉴 것 같다)”고 웃었다.

캠페인 당시 한 인터뷰에서 ‘아카데미는 로컬 시상식’이라는 발언을 해 현지 영화 팬들에게 화제가 된 데 대해서는 “의도를 가지고 도발한 건 아니다. 인터뷰하는 와중에 칸영화제와 비교를 하다가 쓱 나온 말인데 미국 네티즌들이 트위터에 올린 모양이더라. 어떤 전략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대화 중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라고 해명했다.

정치권에서는 ‘봉준호 동상’을 만들고 그의 생가를 보존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런 얘기는 제가 죽은 후에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농을 던졌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으로 그런 기사들은 넘겼다. 그걸 가지고 제가 딱히 할 말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19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생충' 기자회견에 참석한 양진모 편집감독(오른쪽부터), 이하준 미술감독, 배우 조여정, 이선균, 한진원 작가,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봉준호 감독, 배우 송강호,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이 취재진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사회의 불균형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기생충’은 전 세계적인 공감을 이끌어냈다. 빈부격차에 관한 주제는 전작 ‘괴물’이나 ‘설국열차’에서도 이미 다룬 바 있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은 괴물이 한강변을 뛰어다니고 ‘설국열차’는 미래를 배경으로 해 SF적인 요소가 짙었던 반면, ‘기생충’은 동시대적이면서 현실에 기반한 영화이기 때문에 더 폭발력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은 외면하기 싫었다. 코미디적인 면도 있지만 빈부격차와 현대사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쓰라린 면도 있다. 관객들이 싫어할 거란 두려움 때문에 달콤한 장식을 해서 영화를 끌고 가고 싶진 않았다. 최대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솔직하게 그리는 게 이 영화가 가야 할 길이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1000만명 이상의 관객들이 호응해주셨고 전 세계적으로도 오스카 후광과 무관하게 역대급 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상업적 측면이 강조되며 다양성이 상실돼 가는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은 “요즘 젊은 감독들이 ‘플란다스의 개’나 ‘기생충’ 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투자를 받아 촬영할 수 있을까. 냉정히 생각해보면 어려울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은 지난 20여년간 눈부신 발전이 있었지만 동시에 젊은 감독들이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에는 어려워졌다. 독립영화와 메인 스트림이 평행선을 이루는 현실이 안타깝다. 영화의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적인 시도를 수용해야 산업이 꽃피울 수 있다”고 조언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먼저 미국에서 제작되는 ‘기생충’ 드라마의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영화 두 편도 준비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은 “두 편의 작품은 수년 전부터 준비해왔던 터라 ‘기생충’에 대한 반응과 관련 없이 평소대로 진행해나갈 것이다. ‘기생충’도 평소 하던 대로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찍은 영화인데 오늘날의 예기치 못한 결과가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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