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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뚫고 한국 온 리시차, 1000명의 박수가 쏟아지다

리시차. 오푸스 제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도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은 사람들로 붐볐다. 오후 5시가 되자 2500석 규모의 콘서트홀 절반 정도가 찼다. 이토록 많은 시민을 불러모은 이는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47). 검은색 롱드레스를 입고 마스크를 눌러쓴 그가 무대 위 피아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오자 객석에서는 콘서트홀이 가득 찼을 때만큼이나 큰 박수와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박진감 넘치는 타건과 화려한 연주를 자랑하는 리시차는 ‘피아노 검투사’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유튜브 스타이기도 한 그는 국내에서의 팬층도 두텁다. 특히 2013년 첫 내한공연 이후 한국 팬들과 꾸준히 교감해 왔는데, 코로나19 여파로 3~4월 예정된 내한 공연이 사실상 ‘전멸’한 상황에서도 공연 강행 의지를 밝히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는 “한국의 방역시스템을 신뢰하고, 한국인들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콘서트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했다. 자가격리의 위험성이나 항공편 취소 등 향후 공연에 대한 타격을 감수한 한국행이기도 했다.

민감한 시기이니만큼 이날 공연은 방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콘서트홀 내부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고, 손 소독제 역시 공연장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콘서트홀에는 기대감에 가득 찬 팬들이 많았다. 관객들이 어린 학생부터 중·장년층까지 세대를 폭넓게 아울렀다. 친구 3명과 함께 공연을 보러왔다는 고등학생 박은서(18)양은 “중학생 때부터 리시차의 팬이었다”며 “클래식을 즐겨듣는 편인데, 최근 공연이 줄줄이 취소돼 아쉬움이 많았다. 공연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연주회의 이름은 ‘격정과 환희’.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베토벤의 초기, 중기, 후기의 대표적인 피아노 소나타 ‘폭풍’ ‘열정’ ‘함머클라비어’로 프로그램이 구성됐다. 셰익스피어의 ‘폭풍’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폭풍’은 대조적인 선율이 포개진 극적인 분위기의 곡이고, ‘열정’과 ‘함머클라비어’는 난도가 상당해서 한 프로그램으로 묶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함머클라비어’는 다른 규모가 큰 소나타에 견줘서도 곱절이 긴 편이기도 하다. 차분하고 서정적인 ‘폭풍’으로 시작해 점차 고조되는 프로그램 구성은 감정적 고양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경기 성남 분당구에 거주하는 대학생 김동우(24)씨는 “유튜브에서 리시차를 알게 된 팬이다. 실제 공연을 보는 건 처음인데, ‘폭풍’에서 ‘열정’으로 이어질 때 소름이 돋았다”고 전했다.


관람객들이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공연기획사 오푸스(OPUS)는 지난 12일 "한국의 투명한 방역 시스템을 신뢰하고, 한국인들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콘서트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뉴시스


이날 리시차의 공연은 심장을 흔드는 듯한 느낌을 냈다. 심장을 꽉 쥐어 조이다가 박동이 고점에 달했을 때, 순식간에 긴장을 이완했다. 그래서 공연장 안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훈훈하게 혈기가 돌았다. 특히 공연의 정점이었던 ‘함머클라비어’에서 리시차는 자신의 화려한 기교가 음악적 완성도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선율의 부드러운 연결이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해 클래식 애호가들은 물론 처음 공연을 보러 온 이들까지 두루 만족할 수 있는 공연으로 보였다. 빠르게 건반 위를 활주하는 손가락과 선율에 맞춘 리드미컬한 움직임도 인상적이었다.

연주회는 1부와 2부, 인터미션과 앙코르를 포함해 약 2시간30분간 진행됐다. 상당한 체력전이었음에도 리시차는 흐트러짐 없이 연주를 이어나갔다. 그는 2013년과 2017년 내한 때도 무려 3시간에 걸친 열정적인 리사이틀로 박수를 받았었다. 공연 말미 리시차는 감정에 북받친 듯 눈물을 흘리며 약 3분간 무대를 비우기도 했다. 박수 소리에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무대 위에 선 그는 열정적으로 연주회를 끝마친 뒤 몇 번이고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팬들은 리시차가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기까지 오랜 시간 기립박수를 보냈다.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리시차가 남긴 말을 통해, 그가 공연 말미 느꼈을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면서 더는 숨을 곳이 없게 됐어요. 우리는 이미 공포로 마비된 상태죠. 제 연주가 이 공포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작은 몸짓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예요. 음악과 예술은 우리를 단결시키고, 정신을 고양시키기 때문이죠.”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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