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하이에나' 중 한 장면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가 부쩍 늘었다. 단순히 주인공 자리만 꿰찬 게 아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자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지키는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여성에게 부여됐던 클리셰를 완벽하게 깨부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이분법적 구조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서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제작발표회 당시 김혜수의 모습. SBS제공

SBS 금토드라마 ‘하이에나’는 배우 김혜수가 이끈다. 그에게서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강요됐던 얌전하거나 헌신적인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다. 김혜수가 제작발표회 당시 입었던 복장에서도 그 의미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시 빨간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등장했다. 공식석상에서 여성 배우들이 하늘하늘한 원피스나 격식을 갖춘 치마정장을 입은 모습과 대조된다.

김혜수가 연기하는 정금자는 야망을 가진 변호사로,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인물이다. 최근 방송에서 정금자는 더없이 하이에나였다. 회사 인수 합병을 훌륭히 해냈고 가정 폭력범을 처절히 응징했다. 자신이 목표한 모든 것을 하이에나식 생존법으로 직접 뚫어내고 있다.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의 한 장면

SBS 월화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는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극을 이끌고 사건을 진두지휘하는 형사 차영진 역에 배우 김서형이 캐스팅됐다. 전형적으로 남성 캐릭터가 배치됐던 ‘강한’ 역할이다. 차영진은 검붉은 피를 온 몸에 뒤집어쓴 채 용의자를 추적하거나 범죄자를 제압한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까지 드라마 대부분은 남성 캐릭터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됐다. 여성은 사건 해결에 민폐를 끼치거나 보호받는 존재로 그려졌다”며 “지금의 변화는 하루 이틀 사이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여자가 감히 어떻게 복수를 하느냐는 시선 속에서도 1999년 드라마 ‘청춘의 덫’은 미혼모의 복수를 그렸다. 지금 보면 낯설지 않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여성들의 열망이 지금의 ‘하이에나’와 ‘아무도 모른다’를 만들었다.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여성의 모습은 10년 뒤에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한 장면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가 지녔던 감정선에도 변화가 돋보인다. 기존 대중문화 속 여성은 남성에게 사랑받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하이에나’ 속 정금자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사랑과 남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신데렐라처럼 남성을 이용해 신분상승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 위계에 놓였던 남성과 여성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직진하는 여성 캐릭터도 등장했다. 최근 종영한 JTBC 금토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연 조이서(김다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박새로이(박서준)에게 돌진했다.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이었다. 남성의 일방적인 고백을 받고 이를 마지못해 수락하는, 그러다 남성이 없어지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조이서는 박새로이가 자신을 밀어내도 다가갔다. “이 남자를 건드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대표님 힘들게 하는 장가? 내가 부숴줄게”라는 그의 대사에도 기존 클리셰와의 차이가 묻어난다. 여성은 ‘지고지순하게’ 기다리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졌으나 조이서는 이런 방정식을 깼다.

이 평론가는 “신데렐라식 설정은 사라진 지 오래됐다. 여성 캐릭터 변주에는 장르의 다양화가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연애나 결혼 등 사적관계 안에서 남성을 통해 신분상승을 노리는 이야기를 주로 다뤄왔지만 약 5년 전부터는 판세가 바뀌었다”며 “주 시청자인 30~50대 여성의 관심사가 사랑에서 사회적 성공으로 이동하면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욕망이 높아졌다. 연애물에서 정치, 추리, 복수, 경제 등으로 선호 장르가 변화했고 이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의 역할도 커졌다”고 말했다.

드라마 '하이에나' 중 한 장면

스타일링도 주목해볼만 하다. 지금까지 여성 캐릭터는 어깨를 넘기는 머리 길이에, 얼굴은 뽀얗고 쌍꺼풀이 있는 ‘청순가련형’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캐릭터에게는 ‘여자라서’ 요구되는 어떤 외형적인 조건도 없다. 정금자, 차영진, 조이서 모두 머리카락이 짧다. 치마보다는 바지를, 풀메이크업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지향한다.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탈코르셋 운동의 여파로 해석된다.

이 평론가는 “예전에는 여성이 어설프게 남성을 흉내내듯 강한 척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현재는 성 역할을 아예 배제해 한 명의 사람으로서 여성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며 “여성에게 강요됐던 코르셋을 굳이 이런 캐릭터에게 씌울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