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 A씨에게 지난달 29일은 행운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날이었습니다. 50대 손님 B씨를 대구에서 태운 뒤 경남 마산과 부산 일대를 약 4시간 동안 돌았습니다. 택시 미터기 요금은 쭉쭉 올라 26만원을 넘겼죠.

B씨가 마냥 택시 드라이브를 즐겼던 건 아니었습니다. B씨는 택시에서 내려 10분간 어딘가를 다녀온 뒤 다시 타기를 몇 차례 반복했죠. A씨는 처음에 B씨가 택시비를 떼먹는 게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B씨가 휴대전화 번호를 교환한 뒤 매번 택시로 돌아오자 걱정은 사라졌습니다. A씨는 B씨가 부산에서 한 여성에게 현금이 든 봉투를 받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그저 고객의 일이려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게 보이스피싱 범죄 행각이라는 건 경찰 전화로 알게 됐습니다.

A씨는 B씨를 태우고 대구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B씨가 A씨의 택시를 타고 이동 중이란 사실을 위치추적으로 파악한 경찰이었습니다. 낯선 전화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게다가 A씨는 운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은 A씨에게 B씨를 태웠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물론 전화 내용은 B씨도 듣고 있었습니다.

경찰이 쫓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B씨는 즉시 차를 세워달라고 한 뒤 택시비 30만원을 던지고 내렸습니다. B씨는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다른 택시로 갈아탔죠. 범인을 놓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A씨의 기지가 십분발휘되었습니다. A씨는 B씨가 탑승한 택시의 차량번호를 침착하게 기억해 경찰에 제보했습니다. 경찰은 B씨가 갈아탄 택시의 기사 C씨를 찾아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C씨는 마침 B씨를 내려준 뒤 같은 은행에 들어가 돈을 찾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C씨가 제보한 정확한 동선과 위치로 출동했고, 그날 밤 11시쯤 은행에서 송금 중이던 B씨를 체포했습니다.

B씨는 대구‧경북‧부산‧경남 일대를 다니며 은행 채권팀 직원을 사칭해 기존 대출금을 상환하면 싼 이자로 대출해주겠다고 피해자들을 속여 지난달 9일부터 29일까지 24회에 걸쳐 총 2억 6700만원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붙잡힌 날에만도 2500만원을 빼돌렸죠.

B씨의 범행 수법은 철저했습니다.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텔레그램 등으로 범행을 지시받으면서 택시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B씨는 이혼 후 생활고로 고민하며 고액 알바를 알아보다 범죄에 가담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구 달서경찰서는 7일 B씨 검거를 도운 택시기사 A씨와 C씨에게 표창장과 30만원 상당의 포상금을 수여했습니다. C씨는 “은행에 볼일이 있었는데 마침 거기에 범인이 있다기에 도와드린 것일 뿐”이라고 말했죠.

권중석 대구 달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은 “경찰의 검거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기사분들께 감사드린다”면서 “최근 코로나 사태 장기화를 악용한 범죄가 늘고 있어 각별한 주의를 당부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얼마 전 보이스피싱으로 400만원 피해를 본 20대 대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대학생뿐만 아니라 보이스피싱 범죄에 당한 많은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고는 합니다. 힘들게 모은 돈 또는 타인의 돈을 한 번에 잃어버리는 상실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경찰은 이날 B씨가 편취한 2500만원을 대부분 회수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감에 빠졌을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돈을 돌려받고 나서야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택시기사들이 지켜낸 건 단순한 2500만원이 아니라 피해자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소중한 생명 아닐까요.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박준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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