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앞에서 나흘 연속 흑인 사망 항의 시위
“나는 숨쉴 수 없다”…피해자 ‘절규’ 구호로 외쳐
시위 참여자 “인종차별이 코로나보다 더 심한 질병”
“정의가 사라지면 당신도 경찰에 죽을 수 있다”
워싱턴 긴장감 여전히 높아…야간통행금지 발령

미국 워싱턴 백악관 바로 앞에 있는 라파예트 공원에서 31일(현지시간) 흑인 사망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정의 없이 평화 없다(No Justice No Peace)’는 팻말 너머 백악관이 보인다.

미국 ‘권력의 중심’ 백악관이 31일(현지시간) 시위대의 함성에 묻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전파 우려도 시위대의 분노를 막지 못했다.

지난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이 무릎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목을 눌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항의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도 28일부터 나흘 연속 시위가 열렸다.

백악관 바로 앞 라파예트 공원에는 31일 오후 2시쯤부터 시위대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후 6시에는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미국 백악관 앞에서 31일(현지시간) 열린 시위에는 수천명이 참가했다. 워싱턴 경찰들이 시위대를 마주하면서 백악관을 지키고 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쓴 모습이었다. 흑인들이 다수였으나 백인들도 적지 않았다. 젊은 층이 대부분이었고,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 단위 참가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경찰은 경찰 차량으로 백악관 주변 주요 도로를 봉쇄했다.

시위대는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라고 외쳤다. 백인 경찰의 무릎에 숨이 막힌 플로이드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시위대의 외침은 마스크를 통해 나왔으나 울림은 컸다.

미국 백악관 앞에서 31일(현지시간) 열린 시위에 참가한 사람이 ‘나는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고 써진 종이를 들고 있다. 이 말은 백인 경찰에 의해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시위대는 이 말을 구호로도 외쳤다.

시위대는 “정의 없이, 평화 없다(No Justice, No Peace)”는 구호도 목청껏 외쳤다.

시위대는 또 두 팔을 높이 들고 “총 쏘지 마라(Don’t Shoot)”고 고함쳤다. 무장하지 않은 흑인들에 총격을 가하는 사례가 빈번했던 미국 경찰을 비꼬는 표현이었다.

피켓을 들고 나온 시위 참여자도 많았다. ‘흑인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는 문구가 많이 보였다. 한 백인 여성은 ‘침묵은 압제자의 편을 드는 것(Silence Takes the side of the Oppressor)’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침묵하지 말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표현이다.

미국 백악관 앞에서 31일(현지시간) 열린 시위에는 흑인들이 다수였지만 백인들도 많이 참여했다. 백인 남성과 여성이 각각 ‘(피해자) 조지 플로이드를 위한 정의(Justice for George Floyd)’와 ‘침묵은 압제자의 편을 드는 것(Silence Takes the side of the Oppressor)’이라는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건축회사에서 일한다는 흑인 청년 제리 깁슨은 주말인 30일∼31일 이틀 연속 친구들과 함께 백악관 앞 시위에 나왔다고 전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깁슨에게 ‘코로나19 전파 우려도 있는데, 시위에 나와도 괜찮나’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깁슨은 “코로나19로 미국인 10만명이 넘게 사망했다. 비참하고 슬픈 일이다. 나도 코로나19 감염에 대해 신경은 쓰인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깁슨은 “셀 수 없이 많은 흑인들이 미국에서 인종차별로 죽어갔다. 코로나19는 지난 겨울 시작됐지만, 인종차별은 수백년이 넘었다. 나는 코로나19보다 인종차별이 미국에서 더 무서운 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 앞에서 31일(현지시간) 열린 시위에는 가족 단위 참가자들도 보였다. 마스크를 쓴 엄마의 목에 올라 탄 한 아이가 ‘정의 없이 평화 없다(No Justice No Peace)’고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백인 여성 엠마 피셔는 “플로이드가 목이 눌려 숨지는 동영상을 보고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면서 “끔찍하고 역겨운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피셔는 “정의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흑인·백인 구분 없이 누구나 경찰에 의해 죽을 수 있다”면서 “사회의 불법적인 요소들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다음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주변 거리에서 31일(현지시간)건물 보수 공사를 위해 임시로 만든 통로 위에 미국 경찰에 의해 숨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이름이 스프레이로 쓰여 있다.

시위대의 분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했다. 고등학교 교사라는 한 흑인 남성은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인종적인 불평등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부추기는 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트럼프는 절대 사과하지 않을 것이고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트럼프는 외부의 힘으로 막아야 한다. 그래서 시위에 나왔다. 우리 힘으로 트럼프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인 남성 로버트 포스터는 “트럼프 대통령은 그는 이번 시위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애쓸 것”이라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은 모든 면에서 퇴보했다. 특히 도덕적으로 미국은 큰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가 우리의 대통령이라는 것이 부끄럽다”고 비판했다.

미국 백악관 앞 라파예트 공원에서 31일(현지시간) 열린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는 이뤄지지 않았다.

시위 참가자들은 미국 내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시위가 폭력·약탈 양상으로 전개되는 데 대해 우려를 드러냈다. 한 흑인 참가자는 “우리는 무고한 흑인을 죽이는 백인 경찰과는 달라야 한다“면서 “우리는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오후 7시까지는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뤄졌다. 일부 시위대가 경찰 쪽을 향해 물이 든 플라스틱 물병을 던지기는 했으나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일부 시위대는 저명한 흑인 인사들을 많이 배출한 워싱턴의 하워드대학교 앞에서 오후 2시 시작된 집회를 마치고 백악관 앞으로 이동했다.

미국 워싱턴 경찰들이 31일(현지시간) 백악관 주변의 주요 도로를 경찰차로 봉쇄하고 있다.

워싱턴 경찰당국은 백악관의 주변을 통제했다. 백악관의 동·서·남쪽은 막혔고, 시위가 벌어진 북쪽 라파예트 공원 쪽만 개방됐다.

하지만 워싱턴의 긴장도는 여전히 높다. 뮤리얼 바우저 워싱턴 시장은 31일 오후 11시부터 1일 오전 6시까지 야간 통행금지령을 발령했다. 지난 29일∼30일 심야와 새벽에는 백악관을 둘러싸고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워싱턴=글·사진 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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