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더듬고는 서른 살 나이를 맞혔다[이슈&탐사]

[대한민국 데프블라인드 리포트] ⑤‘촉’으로 듣고 말합니다

지난달 20일 서울 동작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저시력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최인옥(오른쪽)씨가 앞이 보이지 않고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현금숙씨에게 촉수화(수화에 손을 얹어서 만지는 수어)를 가르쳐 주고 있다. 권현구 기자

이희경(41)씨는 손으로 사람을 기억하고 구별한다. 피부의 느낌과 손가락 마디의 길이 등을 종합해 인상을 파악한다. 손으로 예측하는 상대의 나이와 직업은 정확도가 꽤 높다. 지난달 8일 처음 만난 기자의 손을 조심스레 더듬어본 희경씨는 “기자라 그런지 손을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네요. 손가락 느낌은 젊은데… 나이는 서른 살 내외신가요?”라고 수어로 물었다. 그가 손끝으로 본 기자의 나이는 정확했다.

희경씨는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나 20대에 시각을 완전히 잃었다. 그와 같은 데프블라인드(Deaf-Blind)들은 ‘촉’으로 세상을 읽는다. 얼굴과 목소리 대신 손 모양과 머리 스타일, 어깨너비 등을 만져 사람을 알아본다. 낯선 공간에 가면 손끝으로 지형지물을 파악한다.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은 취미가 된다. 계속 쓰다 보니 촉각이 예민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다.

전혀 듣지 못하고 시력만 조금 남아있는 박관찬(33)씨는 매주 첼로를 연주한다. 그는 오로지 첼로 줄의 떨림만으로 알맞은 음을 하나씩 찾아낸다. 곡을 연주할 때에는 악보를 볼 수 없어 음계를 모조리 외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연주하는 어울림 예술단에 가입해있는 관찬씨는 지난해부터 동료들과 합주에 도전하고 있다. 그는 “합주할 때에는 지휘자 선생님이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며 박자를 알려 준다”며 “처음 ‘문 리버’ 합주에 성공했을 때 참으로 벅찼다”고 했다.


데프블라인드의 대표적인 소통법은 수어를 손으로 만져 이해하는 ‘촉수화’다. 수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에게도 촉수화는 낯설다. 상대의 손을 얹은 채 수어를 하다 보니 동작이 제한되고 체력 소모도 훨씬 크다. 표정이나 손짓으로 뜻을 유추할 수 없으므로 더 예민하고 섬세해야 한다. 현선미 제주도농아복지관 수어통역팀장은 “일반 수화보다 촉수화를 할 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며 “기본 동작만 같지 기법은 사실상 다르다”고 말했다.

촉수화는 주로 청각장애인이었다가 나중에 시각장애까지 얻은 데프블라인드들이 사용한다. 눈이 보였을 때 주된 소통 수단이 수어였으므로 이들은 촉수화에 비교적 잘 적응하는 편이다. 하지만 시각장애를 기반으로 한 데프블라인드는 촉수화를 배우기 쉽지 않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다.
지난달 22일 서울 동작구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모인 시청각장애인 자조단체 '손잡다' 조원석 대표(왼쪽)와 이규영씨가 손바닥에 글씨를 써서 소통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그래서 이들은 점자나 손바닥 필담 등을 바탕으로 의사소통한다. 가장 인기 있고 효율적인 수단은 ‘한소네’(제품의 이름)로 불리는 점자정보단말기다. 간소화된 키보드와 점자판으로 구성된 이 보조기기는 컴퓨터에 입력된 글자를 점자로 번역하거나 그 반대의 작업을 수행한다.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있고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유튜브를 이용할 수 있다. 단말기를 블루투스로 연결하면 당사자끼리 점자로 채팅도 가능하다.

점자를 손가락으로 상대의 손등에 찍는 ‘점화’도 의사소통 수단 중 하나다. 양손의 검지, 중지, 약지 6개 손가락을 점자의 6점으로 삼아 점자를 입력하듯 터치하면 뜻을 전달할 수 있다. ‘동양의 헬렌 켈러’로 불리는 후쿠시마 사토시 도쿄대 교수의 어머니가 이 방법을 고안해 아들과 의사소통했다. 익숙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해 국내에서는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데프블라인드들은 소통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하지만 환경은 열악하다. 인터넷을 이용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도 있다. 지난달 22일 강원도 원주에서 만난 데프블라인드 박재원(53)씨는 점자정보단말기 지원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그런 기기를 처음 들어 본다”고 했다.

존재를 알아도 이를 손에 넣기는 쉽지 않다. 한소네의 대당 가격은 400만~500만원으로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인 데프블라인들에게 그림의 떡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정보통신 보조기기 대여사업을 통해 빌릴 수 있지만 수요가 많아 점자 테스트 등을 통과해야 한다. 시청각장애가 별도 유형으로 인정되지 않아 시각장애인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고 한다.
점자정보단말기 모습. 최현규 기자

점자정보단말기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찾기 힘들다. 청각장애인이면서 시력을 잃고 있는 방성호(52)씨는 “가르쳐 줄 사람이 주위에 한 명도 없어 한소네 사용법을 독학하고 있다”며 “시각장애인들은 사용법을 들으면서 배우면 되지만 저 같은 시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하므로 배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

촉수화를 통한 의사소통을 도울 수어통역사도 매우 부족하다. 시청각장애인 김지현(51)씨는 “우리나라는 촉수화 통역사가 서툰 경우가 많고 저도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어서 서로 눈을 찌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는 ‘시청각장애인이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 보조기구를 개발·보급하고, 의사소통 지원 전문 인력을 양성·파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개정법 시행일이 이달 4일이었지만 보건복지부는 아직 이 조항을 어떻게 실천할지 구체적인 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가 꾸물대는 사이 민간이 더 빨리 움직이고 있다. KASLI한국수어통역사협회는 2018년부터 ‘농맹인을 위한 수어통역사 양성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농아인협회 소속 수어통역사들을 상대로 시청각장애인의 특성과 촉수화 기법을 가르친다. 지금까지 50여명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데프블라인드 당사자도 프로그램의 강사로 활동한다. KASLI한국수어통역사협회 부회장인 고경희 통역사는 “지역별로 농맹인을 위한 통역사를 넉넉히 배치할 수 있도록 지부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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