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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고 물 건너… 갇혀있는 할매를 찾았다[이슈&탐사]

[대한민국 데프블라인드 리포트] ⑧한국에도 헬렌켈러 센터를

제주도에 사는 한 시청각장애인 할아버지가 돋보기로 자신의 신분증을 들여다보고 있다. 제주도 농아복지관은 지난해부터 실태조사를 통해 숨어 있는 데프블라인드들을 발굴하고 있다. 제주도 농아복지관 제공

지난해 초 제주도 모든 사회복지시설과 요양원에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발신인은 제주도 농아복지관.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시설에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쓴 건 정우정 기획홍보팀장 등 농아복지관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답장이 올 때마다 해당 기관을 방문해 시청각장애인이 맞는지 확인했다. 길거리에 현수막을 붙이고 주민센터를 돌아다니며 장애 복지 담당자를 만났다. ‘우리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사회복지사와 수어통역사, 점역사 3명으로 꾸려진 조사팀은 제주 곳곳을 누비며 ‘데프블라인드’(Deaf-Blind)를 찾아냈다.

기록에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갔더니 ‘옆집 할머니도 귀가 안 들리고 눈이 안 보인다’는 말에 뜻밖의 ‘발굴’을 한 적도 있다. 농아복지관이 이렇게 확인한 제주도의 데프블라인드는 57명이다. 대부분 장애 관련 지원을 받지 못했고 집 안에 방치돼 있었다. 눈 멀고 귀가 안 들린 채 살다가 사망했지만 장애 기록이 없었던 사람도 있다. 농아복지관은 올해는 도내 의료기관에서 시청각장애인을 찾아낸다는 계획이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방치된 시청각장애인에 관한 정책을 수립하려면 실태조사가 먼저 실시돼야 한다. 자체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제주도와 달리 중앙 정부는 이제야 실태조사를 준비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올해 예산 3억원을 배정해 전국 차원의 실태조사를 추진, 연말까지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시각과 청각 모두에 장애가 있다고 등록한 숫자를 근거로 국내에 9173명의 데프블라인드가 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어느 한 쪽에만 장애가 있다고 등록한 이들이 많아 실제 숫자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당사자가 음성 언어도, 수어도 잘 못해 소통이 안 되는 경우라면 조사는 더욱 어려워진다. 정우정 팀장은 “데프블라인드는 워낙 특수한 장애라 기존 장애인실태조사처럼 짧게 교육받은 조사원을 투입한다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전문가들이 각 지역에 깊숙이 들어가 당사자를 발굴해야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찾은 제주도 농아복지관 1층에 시청각장애인 관련 캠패인 팻말들이 비치돼있다. 제주=방극렬 기자

지난달 13일 찾은 제주도 농아복지관 1층은 시청각장애인을 위해 꾸며진 공간이었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이들도 소통할 수 있도록 보조기기 사용법을 알려주는 교육실이 있었고 시청각장애인 서비스 지원 사무실이 위치해있었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시청각장애인들이 장애 그대로를 인정받는 공간이었다. 시청각장애인들은 이곳에서 의사소통과 감각 발달 교육 등을 받는다.

제주도는 지난해 6월 ‘시청각중복장애인의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조례는 데프블라인드에 대한 의사소통, 교육, 일상생활 지원 등의 조치를 강구하도록 했다. 3년마다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권리 보장과 지원을 위한 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국내에서 시청각장애인 관련 법적 근거를 처음으로 마련한 사례였다.

문제는 이런 곳이 전국에서 제주도 딱 한 곳이라는 것이다. 시청각장애인에게 어떤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하는지 아는 곳은 극히 드물다. 정부 차원의 가이드라인도 물론 없다.

전문가들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지적하는 건 의사소통 교육이다. 2017년 시청각장애인 24명을 심층 면접한 한국장애인개발원의 보고서 따르면 데프블라인드 약 40%가 다른 비장애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도, 전달받지도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선천적 장애가 있거나 어린 시절에 장애가 생긴 아동들은 시력·청력이 조금씩 남아있어도 필요한 소통 방법을 배우기 힘든 실정이다.

시청각장애인이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방적인 지원 대상이 아닌 사회의 독립된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재팀이 만난 시청각장애인 김남일(32)씨는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할 때가 있다. 스스로 돈을 벌어 쓰는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시각장애인 복지관 라이트하우스에서 시청각장애 전문가로 일하는 최숙희 교사는 “미국의 데프블라인드들은 직업을 갖고 경제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돈이나 돌봄 인력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보다 의사소통과 보행, 취업 훈련을 통해 자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국립 헬렌켈러 센터'(HKNC) 전경. HKNC 페이스북 캡처

이들에게 종합적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결국 전담 기관이 설치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미국은 1967년 ‘헬렌켈러법’을 제정해 ‘국립 헬렌켈러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미 전역에 10개 지부를 두고 있는 헬렌켈러 센터는 시청각장애인에게 의사소통과 이동, 자립, 직업재활을 가르쳐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비영리기관인 데프블라인드서비스센터, 미국데프블라인드협회 등도 이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일본은 장애인종합지원법 등에 따라 ‘맹농인’(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지원 인력 양성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가 전문 돌봄 인력을 직접 길러내고 파견하는 것이다. 전국맹농인협회가 관련 복지 사업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예산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말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 시청각장애인 전담 기관의 설치 필요성이 담겼다. 하지만 정부는 ‘정확한 실태와 복지 수요가 파악되지 않았다’며 후속 조치를 미루고 있다.

한국의 데프블라인드들은 기본적인 서비스부터 받기 어렵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이들이 이동하거나 타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애인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의 인력·지원이 필요한데, 효율과 성과를 추구하는 행정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한 장애인 시설 관계자는 “공무원들은 늘 대상·인원 등 실적 중심으로 예산을 편성한다. 시청각장애인 관련 사업을 준비해가도 ‘몇 명 안 되는데 지원이 꼭 필요하냐’는 식”이라고 말했다.

문성은 제주도 농아복지관장은 “일반적인 장애인 복지시설의 개념에서 벗어난 시청각장애인 전담 기관이 설치돼야 한다”며 “만약 자신이 시각과 청각이 없는 채 태어났다고 상상한다면 누구나 그 필요성에 동감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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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탐사2팀 권기석 김유나 권중혁 방극렬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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