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후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피해 호소인께서 겪으시는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이런 상황에 대해 민주당 대표로서 다시 한 번 통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 15일 최고위원회의)

“피해 호소인의 고통과 두려움을 헤아려 피해 호소인을 비난하는 2차 가해를 중단해줄 것을 부탁드린다” (청와대, 13일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

“피해 호소인에 대한 신상털기와 비방, 모욕과 위협이 있었던 것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한다. 더 이상 이 같은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당 여성의원들, 14일 성명)

“가장 고통스러울 수 있는 분은 피해호소인이라고 생각한다. 피해호소인에 대한 신상털기나 2차 가해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 10일 박원순 전 시장 빈소에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의혹으로 고소한 이를 두고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박 시장의 사망으로 사실관계를 가릴 수 없기 때문에 피해자라고 지칭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린 용어다.

서울시 뿐 아니라 청와대와 정부, 여당까지 피해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이 이런 애매한 표현을 쓰면서 박 전 시장에 대한 책임의식을 줄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여권이 그동안 강조해 왔던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최현규 기자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법률적으로는 아직 고소인이 맞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수사기관에 처벌을 요청한 이를 고소인으로 본다. 다만 박 전 시장이 사망해 경찰은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길 방침이다. 수사받을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여권에선 피해자를 고소인으로 명명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피해자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있다. 가해자의 경우 수사 상황에 따라 피의자로 바꿔 부르기도 하지만 피해자는 통상 처음부터 피해자라 부른다. 다만 민주당 측은 박 전 시장의 혐의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해당 직원을 피해자라고 부르기 부담스럽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피해호소인이라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사용된 것이다.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는 법률사전에 등장하는 공식 용어가 아니다. 피해를 주장하고 있는 사람을 줄여 피해 호소인이라는 조어를 사용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번 경우처럼 정부나 정당 등에서 마치 합의라도 한 듯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다.

다만 일각에선 ‘피해호소인’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식용어도 아닌데다가 형식적 증거를 갖춰서 문제를 제기하기 보다는 다소 막연하게 피해를 주장한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민주당 윤준병 의원은 박 시장 의혹과 관련해 “침실, 속옷 등 언어의 상징조작에 의한 오해 가능성”을 언급했다. 결국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에는 피해자 측의 일방적 주장이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피해 호소 여성이 무슨 뜻이냐. 또다시 그 빌어먹을 무죄 추정의 원칙인가”라며 “피해자라는 말을 놔두고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생소한 신조어를 만들어 쓰는 것은, 성추행 사실을 인정할 의사가 없다는 얘기”라고 꼬집었다.

유의동 미래통합당 의원도 15일 불교방송 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피해자를 ‘피해 호소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혐의 사실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일부러 의도적으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라며 “2차 가해를 더 조장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바로 그 단어 속에 여당의 생각들이 다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청와대 등이 사건에 따라 용어를 다르게 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5월 1일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15년간 성폭행을 한 친부를 엄벌해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 게시물을 언급했다. 그는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돼 죄에 상응하는 형벌이 선고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당시 재판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피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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