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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불안 속 접경지 주민들 “다시 범람하면 아무것도 못건져”

물폭탄 예보에 北 무단방류 공포까지 겹쳐

경기도 파주 파평면 율곡리의 한 습지공원 주차장 입구. 지난 5일부터 임진강변의 수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공원 입장이 통제됐다. 파주=황윤태 기자

“한 번 고비는 넘겼는데 이제부터가 제일 무섭죠. 다시 범람하면 아무것도 못 건져요”

9일 경기도 파주 율곡리에서 만난 차모(74)씨는 지난 주말만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몸을 떨었다. 지난 6일 집중호우와 함께 북한이 사전 통보 없이 황강댐 수문을 열어 임진강이 역대 최고 수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율곡습지공원 앞 도로에서 갑자기 차오른 빗물에 버스가 순식간에 잠기는 아찔한 사고도 발생했다. 버스가 잠겼던 도로 주변 가로수에는 토사가 아직도 흥건했고 논밭도 아수라장이 됐다. 습지공원은 임시로 출입이 통제됐지만 별도의 안내문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경기도 파주 파평면 율곡리의 한 도로가 물에 잠겨 있다. 지난 6일 이 지역에는 임진강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물에 잠겼다. 파주=황윤태 기자

접경지역 주민들이 긴 장마와 북한의 황강댐 무단 방류로 인한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주민들은 모레까지 최고 300㎜의 많은 비가 예보된 가운데 북한의 무단 댐 방류가 또 이어지면 큰 피해가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파주 파평면과 진동면 인근에서는 지난 5일부터 300여명의 주민들이 마을회관과 학교 등에서 대피생활을 했다. 이들은 임진강 수위가 낮아진 지난 8일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이날도 파주 일대에는 12시간 동안 112㎜의 많은 비가 쏟아졌다.

접경지대 주민들은 주말 내내 피해를 입은 논밭을 복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주민들은 20여년 만에 가장 큰 수해라고 입을 모았다. 진동면 주민 박모(74)씨는 “90년대 중반 문산읍부터 이 마을까지 전부 물에 잠길 정도의 큰 물난리 이후 가장 비가 많이 왔다”면서 “주말에는 강물이 구경도 하기 무섭게 불어났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임진강 수위 상승으로 피해를 입은 비무장지대 내 논밭을 수습하고 있다. 사진은 임진강변에 있던 배를 트랙터로 꺼내고 있는 모습. 김병수 이장 제공

주민들에 따르면 비 피해는 임진강 건너 비무장지대 지역에 집중됐다. 김병수(62) 임진리 이장은 “임진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강뻘이 논밭 1만6500여㎡(5000여평)를 뒤덮어버렸다”면서 “오전에 비무장지대로 들어가 농기계만 간신히 고지대로 옮겨놓고 왔다”고 말했다. 김 이장은 “아침에 잠시 내린 비는 강뻘을 씻어주는 역할을 했지만 더 많은 비가 내리고 북한이 다시 강물을 방류한다면 그때는 수위가 더 높아질 수 있다”며 답답해했다.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통문이 물에 잠긴 모습. 접경지대 농민들은 군 당국의 협조를 받아 이날 오전 비무장지대 내 논밭을 수습했다. 김병수 이장 제공

다른 주민은 “자연재해 뿐 아니라 북한 때문에라도 재난이 발생하고 있는데 재난지역으로 지정도 안 된 것이 화가 난다”고 말했다. 지난 6일 문재인 대통령은 경기도 연천 군남댐을 방문해 “무단으로 물을 방류한 북한의 태도가 아쉽다”고 말했다. 군남댐은 황강댐의 방류로 인한 수해를 막는 방어용 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군남댐을 방문, 권재욱 한국수자원공사 연천·포천권 지사장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진강변 어부들은 7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무단방류에 더 난색을 표하고 있다. 물살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임진강 5개 선단 80여척 중 10여척이 유실됐다. 어촌계 사무실에서 만난 어민 장모(51)씨는 “황강댐에서 통보 없이 수문을 열면 군남댐도 같이 문을 열게 돼 수심 깊은 곳의 차가운 물이 하류로 쏟아지게 된다”면서 “찬 물 때문에 어류도 폐사하는데다 논밭도 냉해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남북은 2009년 10월 임진강 수해방지 실무회담에서 황강댐 방류 시 남측에 사전 통보하기로 합의했지만 2013년 이후로는 통보를 하지 않고 있다.
경기도 파주 파평면의 한 옥수수밭에 옥수수가 넘어져 있다. 농부들은 강뻘이 논밭을 파묻으면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파주=황윤태 기자

파주=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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