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연준 ‘달러 바주카포’ 쏘는데… 실물경제는 돈맥경화 왜? [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돈]

‘리먼’에서 ‘코로나’까지… 돈 풀기에 빠진 세계


“2022년 말까지 ‘제로(0) 금리’를 유지하겠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제롬 파월 의장은 코로나19 대응책으로 ‘달러 바주카포’를 꺼내 들었다. 시장에 유동성이 마르고 기업과 개인이 파산하는 걸 막기 위해 대대적인 ‘돈 풀기’에 나선 것이다. 아예 제로 금리의 시한까지 못박았다. 일본·유럽 중앙은행도 전격적 금리 인하와 채권 등 각종 자산 매입 등으로 시장에 현금을 수혈했다. 이러한 조치로 글로벌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았고, 주가 지수도 반등세로 돌아섰다. 코로나 쇼크로 촉발된 ‘경제 혼수상태’에서 잠시나마 깨어난 셈이다.

그러나 넘쳐나는 돈이 실물 경제와 자산 가격의 괴리를 키우면서 ‘유동성 함정’에 대한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유동성이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쓰이기보다 주식과 부동산 등에 쏠리며 ‘자산 버블(거품)’ 현상만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물 경제를 살리려 뿌린 돈이 엉뚱한 곳에서 잠자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통화량을 늘려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정말 괜찮은 걸까.

돈 푸는데 돈은 안 돈다
“제가 1만원을 기름 넣는데 썼다고 합시다. 주유소는 그 돈으로 점심을 사먹거나 직원들 월급을 줘요. 이렇게 되면 1만원이 두 번 돈 겁니다. 그런데 이 돈이 부동산이나 주식시장으로 가버리면 소비로 연결되지가 않아요. 그건 금융 거래지 실물 거래가 아니잖아요.”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는 걸 나타내는 지표로 ‘화폐유통속도’의 하락을 꼽는다. 화폐유통속도는 돈이 상품·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몇 번이나 사용됐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통상 호황기에는 속도가 증가하고 불황기에는 감소하는 경향을 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화폐유통속도는 꾸준히 하락 추세를 면치 못했다. 미국 M2(시중 통화량) 기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1.9~2.0 수준을 오가던 화폐유통속도는 양적완화 이후 내림세를 거듭했다. 특히 코로나 사태가 터진 올해 들어선 1.4에서 1.1까지 급전직하했다. 국내 통화유통속도 역시 올 1분기 기준 0.64까지 떨어지며 한국은행 집계(2001년 12월 이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돈이 시장에서 돌지 않고 어딘가에 잠자고 있다는 뜻이다.

안 교수는 “실물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가격이 오르는 자산 시장으로만 돈이 쏠리며 벌어지는 현상”이라며 “투자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부의 양극화’가 커지면서 좋든 싫든 자산 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10일 말했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돈을 풀어아 하는 건 사실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런데 풀린 돈이 실물 경제로 가기보다 자산 시장으로만 가고 있으니, 말 그대로 돈의 적중률이 떨어진 셈이죠.”

‘경기 침체→돈 풀기’의 공식
시장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가 경제 위기의 해법으로 본격 등장한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였다. 부실 대출이 쌓여 터진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해결책으로 미 연준은 화폐를 찍어내는 통화정책을 선택했다. 금융시장이 마비되고 각종 자산 가격이 급락하는 상황에서 경제를 다시 원활하게 돌리는 방법은 통화량을 늘리는 것 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당시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은 “경기 부양을 위해서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겠다”는 발언으로 ‘헬리콥터 벤’이란 별명을 얻었다.

마구잡이로 돈을 뿌리는 정책은 놀랍게도 효과를 거뒀다. 급락했던 주가는 불과 1년 여 만에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미국 경제는 세계 최강대국의 자리를 지켰다. 애플·아마존 등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기업들이 성장하며 미 증시는 이후 10년 넘게 장기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코로나 쇼크 직전까지 미국 실업률은 3.6%로, 과거 50년과 비교해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다. 물가 상승률은 연 2% 안팎으로 안정적 수준을 유지했다.

반면 다른 길을 간 유럽 국가들의 성과는 달랐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08년 금융 위기와 2012년 재정위기를 겪으며 양적완화 대신 ‘긴축’ 위주의 정책을 폈다. 빚으로 생긴 금융 위기를 극복하는 해결책은 결국 빚을 줄이는 것 뿐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경기는 빠르게 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침체가 장기화됐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2014년 펴낸 보고서에서 “소위 ‘더블딥’(잠시 회복 후 다시 침체)에 빠지는 유럽 국가가 속출하면서 경기 침체 시기에 긴축이 적절한 정책인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고 짚었다. 유럽 경제는 그 후 ‘저금리·저성장·저물가’라는 일본식 불황에 빠지며 ‘잃어버린 10년’을 겪었다.

현재 코로나 위기에 직면한 세계 각국은 적극적인 돈 풀기 정책에 나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일본뿐 아니라 신흥국까지 양적완화에 팔을 걷어붙인 상황이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최근 “크로아티아, 폴란드 등 유럽 중산층 국가를 비롯해 콜롬비아, 칠레 등 중남미 국가도 사상 최초로 돈 풀기를 실험하고 있다”며 “양적완화는 이제 세계화됐다”고 보도했다.

돈 풀기가 답이라고?
부채와 자산 거품으로 인해 생긴 경제 위기의 해법으로 왜 ‘유동성’이 거론될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명예교수는 저서 ‘불황의 경제학’에서 이른바 ‘베이비시터 조합’ 이론을 통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맞벌이 부부들에게 한 시간 동안 다른 부부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쿠폰을 발행해 준다고 가정해 보자. 구조적으로는 모두가 공평한 효율적 시스템이다. 그러나 곧 시장 실패 상황이 벌어진다. 당장 외출하지 않는 부부들은 최대한 쿠폰을 적립하려 하고, 쿠폰 회전율이 줄어들면서 그 가치는 점점 높아지고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더 꺼리게 됐다. 소위 ‘불경기’가 발생한 것이다. 이 경우 최선의 해결책은 쿠폰을 더 많이 발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베이비시터 부부들은 하나의 작은 경제를 상징한다. 쿠폰은 화폐를 의미한다. 불황은 대다수 사람들이 현금을 쌓으려 하고 소비와 투자를 꺼릴 때 발생하는데, 이는 더 많은 화폐를 투입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게 크루그먼 교수의 설명이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도 이러한 관점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 정책을 펼쳤다. 1930년대 대공황과 1990년대 일본의 장기 침체 등은 모두 제때 시장에 돈을 퍼붓지 않아 경제 피해가 더 커졌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버냉키 전 의장은 최근 코로나 사태에서도 “위기 극복의 길은 단호한 통화 확장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유동성이 폭증하면서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과 자산 시장과의 괴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실물 경제는 맥을 못 추는 상황에서 주식과 부동산, 금 등과 같은 자산 가격은 무섭게 오르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동성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폴 크루그먼 교수조차 최근 미국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미국 증시에 광기가 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상승 랠리에서 나만 소외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FOMO·Fear of missing out)이 팽배해 있다”고 진단했다.

멈출 수 없는 ‘돈 풀기’의 유혹
이 같은 자산 버블을 잠재우는 해결책으로 꼽히는 건 바로 ‘금리 인상’이다. 금리를 올리면 자산 시장에 과도하게 쏠린 자금의 물꼬를 자제시키는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시장 충격으로 경제가 급작스러운 침체에 빠져드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는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가 계속 화폐를 찍어내야 한다는 이른바 ‘현대통화이론(MMT)’까지 등장한 상황이다.

안동현 교수는 “유동성 공급 감소는 사실 결정하기 쉽지 않은 문제”라고 말한다. “이게 한 번 불이 붙어버리면 끄기가 쉽지 않거든요. 이런 상황이 버블이냐고 하면 저는 솔직히 버블이라고 봅니다. 금리를 올리면 한 방에 해결이 되지만 그러면 실물 경제가 죽는 상황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쉽지 않은 문제에요.”

금융위기 때는 ‘애플’, 코로나로 풀린 돈은 ‘이곳’으로 몰린다[유동성 파티, 불안한 내돈]

양민철 조민아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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