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금촌고시원 오 원장은 도망자의 짐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조금씩 세상을 바꿔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널리] 전합니다. 자, 오늘은 ‘고시원 오 원장’의 하루를 소개합니다.

금촌고시원 오윤환 원장이 고시원 입구에 서서 환하게 웃고있다. 그는 어려운 처지의 투숙객들에게 이곳이 '기회의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민석 기자

금촌고시원에는 머물 집이 없고 찾을 사람이 없는 자들이 모여 산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술에 절어 세월을 보낸 한때의 가장,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 오랜 수용 생활 끝에 사회부적응자가 된 출소자, 내일은 죽으러 가야 하니 오늘 하루만 빈방을 달라는 방랑객까지. 모두가 자신을 ‘실패자’라고 소개했었다.

오윤환(66) 원장이 이들에게 고시원 방을 내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여기를 발판 삼아 이토록 좋은 세상을 더 누렸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일단 먹고 자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을 사람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건넸다. 방세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 그다음에는 멋있고 훌륭한 삶이 아니라 적당히 괜찮은 삶을 살아보라고 다독였다. 무력했던 실패자들은 그의 말에 길바닥 공병이라도 주워 팔겠다는 다짐을 세웠고 제2의 인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18년간 이어온 금촌고시원의 기적. 우리는 지난 1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고시원을 찾아 오 원장과 투숙객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800만원 적자, 그래도 괜찮아요
오 원장이 투숙객들에게 줄 닭볶음탕을 만들고 있다. 궂은 여름을 보내고 몸보신을 위해 고른 메뉴라며 웃었다. 최민석 김다영 기자

고시원 부엌이 분주했다. 오 원장은 닭볶음탕을 만들겠다며 카메라를 향해 커다란 토종닭을 들어 보였다. 한낮이어서 ‘점심 식사를 위한 거냐’고 물으니 저녁밥으로 먹일 메뉴라며 웃었다. 오 원장은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30인분 아침밥을 한다. 투숙객들의 세끼를 혼자 책임져야 하니 새벽 4시쯤에는 눈을 떠야 한다. 험한 일을 하는 일용직들이 많고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어 꼬박꼬박 든든한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금촌고시원에서 가장 싼 방은 23만원이다. 이마저도 다 못 받는 경우가 많다. 일자리를 구하느라, 병원비를 내느라 수입이 아예 없는 사람은 당분간 그냥 머물게 한다. 그러다 보니 오 원장 손에 쥐어지는 건 고시원을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재작년에는 800만원 적자를 봤다. 그는 “참 열심히 살았는데 한 달에 10만원씩 들던 적금 두 개가 모조리 날아갔더라고요”라고 말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그만큼 익숙한 일이었다.

그동안 오 원장이 투숙객들을 위해 만든 국과 반찬들. 그는 매일 30~40명이 먹을 식사를 하루 세끼 만든다. 금촌고시원 홈페이지

오 원장은 쉬는 법이 없다. 한 달에 한번 적당한 날짜를 정해 떡이나 케이크를 준비한다. 투숙객들의 생일을 챙기려는 거다. 명절도 마찬가지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기에 더 신경이 쓰인다. 설에는 떡국을 끓이고 추석에는 송편을 빚는다. 얼마 만에 받아본 건지 모를 생일상 앞에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 원장은 이런 크고 작은 이벤트를 멈추지 않는다.

어지간한 식당만큼 밥을 하고,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 고시원.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하자 오 원장은 “내 집 사람들이 굶는 걸 보는데 내 입에만 밥을 넣을 수는 없겠더라고요”라고 했다. 그리고는 “빈방인 채로 둬봤자 거기에서 돈이 나오겠어요? 원래 먹는 밥에 숟가락 몇 개 더 놓으면 그만 아닐까요?” 되물었다.

그 실패자에게서 내 모습을 봤다
금촌고시원이 문을 연 건 2002년 4월이다. 오 원장은 1979년 서울 한 신문사에 입사한 뒤 약 20년을 언론인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IMF 외환위기 여파로 1998년 6월 정리해고 대상자가 돼 회사를 나왔다. 하루아침에 펜을 잃고 몇 년간 방황하다 시작한 게 바로 이 고시원이다.

오 원장이 빈방이 깨끗하게 정리 중이다.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방세를 받지 않기 때문에 직원을 채용할 돈이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오 원장의 몫이다. 최민석 기자

초반에는 시청·법원 직원, 세무사, 약사 등 이른바 엘리트층들이 묵었다. 덕분에 고시원은 무리 없이 굴러갔고 매달 수입도 적당했다. 4~5년 정도 흐르자 인근 곳곳에 건설 현장이 들어섰고 수입이 일정치 않은 떠돌이 노동자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 원장은 그 무렵 고시원을 찾았던 손님의 첫 마디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사람이 ‘며칠 굶어 정말 배가 고픈데 밥 한 그릇만 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입고 있는 옷은 멀쩡한데 얼굴을 보니까 정말 표정이 말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일단 밥을 먹였죠. 그걸 다 먹고 나니 또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면 좋겠습니다’ 하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자기 얘기를 하는데,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예요.”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니 오 원장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요리할 때는 이보다 편한 복장을 입어야 한다. 최민석 기자

그는 사업에 실패했고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든 돈을 벌어서 갚겠다며 “해주세요, 해주세요”를 반복했다. 오 원장은 그의 얼굴에서 몇 년 전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단다. 아내와 두 딸에게 차마 “회사에 쫓겨났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그때. 원래 그랬던 것처럼 매일 같은 시간 출근했고 끼니를 다 건너뛴 채 저녁 어스름 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척’을 했었다.

오 원장은 생각했다. 내가 절망했을 때 의지할 곳이 없어 힘들었지, 저 사람이 기거할 곳이 없다며 부탁하는데 내가 매몰차면 안 되지. 그리고는 선뜻 “이 방을 쓰세요”하며 열쇠를 건넸다. 그게 시작이었다.

도망자의 마음을 누가 알까요
고시원에는 작은 사무실이 있다. 오 원장은 이곳에서 여러가지 업무를 보고 밤이 늦어지면 한쪽에 마련해 둔 간이 침대에서 눈을 붙인다. 최민석 기자

수많은 사연이 이곳을 스쳐 갔다. 하나같이 우울했고 앞이 캄캄했다. 사회는 그들을 대개 ‘부도자’ ‘장애인’ ‘알코올중독자’ ‘사회부적응자’ 같은 말로 불렀다. 이름 없이 사는 사람들이었다. 오 원장은 투숙객들의 사정을 주욱 늘어놓으며 “그래도 처음부터 실패한 인생은 없어요”라고 말했다.

“여기 오신 분들 나이가 40~50대 이상이에요. 그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고요. 사업을 했고 또는 직장 생활을 했어요. 자기에게 맞는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단 말이에요. 그땐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직원들에게 최고였던 사람들이에요. 그게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혹은 어려운 나라 사정으로 인해 무너졌을 뿐이에요. 그들은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죠.”

방세를 내지 않고 도망간 사람들의 짐이다. 오 원장은 그들의 물건을 버리지 않는다.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안타까움이 훨씬 더 크다"고 답했다. 최민석 기자

오 원장은 인터뷰를 하던 중 휴게실 한쪽에 쌓아둔 짐들을 가리켰다. 방세를 내지 않고 도망간 사람들의 옷가지를 모아둔 거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그들은 몸을 여밀 옷 하나만 걸친 채 말없이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주인 잃은 빈방을 바라보며 오 원장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는 실망보다 안타까움이 훨씬 더 크다고 말했다. 다시 겨울이 돌아올 텐데, 그 추위에 무슨 옷을 입으려고 이걸 다 놓고 갔나 싶어 가슴이 저린단다. “우리가 어딜 갔다가도 내 물건을 놓고 오면 다시 찾으러 가잖아요. 내 건 그만큼 소중해요. 그런데 그걸 다 놓고 뒤돌아섰을 때는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겠어요. 재워주고 밥해주고 다 하는데 말 한마디 못하고 짐을 다 두고 갔을까….”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듯 오 원장의 말끝이 흐려졌다.

벼랑 끝에 선 자들의 변화
금촌고시원은 어려운 사람을 무조건 품는 곳이 아니다. 오 원장은 넘어진 자들의 자립을 독려하는 데 가장 큰 힘을 쏟는다. 투숙객들과 상담 시간을 가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말 같지도 않은 엉뚱한 이야기를 털어놔도 다 들어주고 대답해줬어요. 이걸 여러 번 하니 조금씩 바뀌더라고요. 매일 처박혀 술만 마시던 사람이 고물을 줍겠다며 리어카를 빌리고, 죽으러 가겠다던 사람이 교회를 나가더라니까요. 시간이 걸릴 뿐이지 언젠가는 변화해요”라고 확신했다.

한 투숙객이 자립 후 찾아와 오 원장에게 선물했다. 그는 고시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 편지에는 죽음까지 생각했던 그가 오 원장을 만나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가 담겨있다. 최민석 기자

이를 직접 증명해 보인 사람들도 많다. 오 원장은 고시원 입구로 올라서는 계단 위에서 벽에 걸린 큰 액자를 바라봤다. 작은 붓글씨로 쓴 빽빽한 글이었는데 거기에는 ‘세상을 떠나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원장님 덕분에 지금 행복한 삶을 산다’는 구구절절한 감사 인사가 담겨있었다.

전자제품 수리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사람이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러다가 오 원장을 만났고 삶의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의 여성 투숙객과 마음을 나누고 가정까지 이뤘다. 두 사람은 오토바이 배달과 식당 설거지로 차근차근 돈을 모았고 지금은 근처에서 식당을 차리고 산다.

오 원장은 지금도 고시원에 머물고 있다는 한 투숙객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긴 수용 생활을 끝내고 고시원에 들어왔다. 몇 개월간 사람과 대면하는 일이 없었다. 부엌에 밥을 먹으러 나왔다가도 누군가 있으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오 원장은 그의 손을 잡아끌었고 조금씩 변화시켰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돈 몇백만원을 쥐여주고 자립을 권유했을 때도 그는 다시 돌아와 오 원장 곁에 남았다. 그는 지금도 바쁠 때마다 오 원장의 손을 돕는다.

한 주민이 호박이 잔뜩 든 비닐봉지를 들고 고시원을 찾았다. 오 원장은 "고시원 사정을 알고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다. 그 정성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최민석 기자

취재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하는데 고시원 입구에서 누군가 주뼛대며 눈치를 봤다. 오 원장이 큰 소리로 알은체하자 그제야 그가 커다란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들어섰다. “이거 별건 아닌데 밥 해주는 데 보태라고.” 직접 농사지은 호박을 따왔다는 한 주민이었다. 오 원장의 노력과 응답하는 사람들. 여기에 더해지는 손길들이 모여 고시원의 기적을 만들고 있었다.

▼ ‘고시원 오 원장’과의 영상 인터뷰



문지연 기자, 촬영·편집=최민석 김다영 기자 jymo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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