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 화물선의 비극’ 영국은 풀었지만 한국은 아직 미궁

침묵의 3461m, 거기 진실이 있다 -영국인 재난피해자 폴 램버트씨 화상인터뷰

폴 램버트 더비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표가 국민일보와 '줌' 화상인터뷰를 하고 있다.

바다가 좋아 배를 탄 아들은 그렇게 바다가 됐다. 아들 뒤로 ‘3461m’라는 숫자가 남겨졌다. 3461m, 아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다 깊이다. 가닿을 수도 직접 들어갈 수도 없는 망망대해. 바다는 가족의 삶을 집어삼켰다.

당신은 스텔라데이지호를 아는가. 이 배는 2017년 3월 31일 남대서양에서 선원 22명(한국인 8명·필리핀인 14명)과 함께 증발했다. 만든 지 25년이 넘어 낡을 대로 낡은 배였다. 27일은 이런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한 지 1277일째 된 날이다.

가족들은 침몰 원인을 밝히기 위해 긴 싸움을 벌여왔다.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무렵이던 지난해 2월, 심해수색이 이뤄졌다. 수심 3461m 바닷속에서 선체와 블랙박스(VDR·항해기록저장장치)를 찾았지만, 데이터 분석에는 실패했다. 포기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정부에 2차 심해수색을 공식 요구하고 있다. “또 세금 낭비냐” “국가가 이만큼 해줬으면 됐다”는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2019년 2월 21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과 시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유해 수습 및 인근 해저면 추가 수색을 호소하고 있다. 이날 외교부는 스텔라데이지호 사고 해역 심해수색 중 선체 파편물 주변 해저에서 사람의 뼈로 보이는 유해의 일부와 작업복으로 보이는 오렌지색 물체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여기 이들의 아픔을 40년 전 똑같이 겪어낸 남자가 있다. 영국인 폴 램버트(68)씨다. 그는 화물선 ‘더비셔호’의 침몰로 19세 막냇동생을 잃었다. 1980년 9월 10일, 일본 오키나와 바다에서 벌어진 일이다. 타이태닉호 이래 영국 최대 해양참사로 기록된 이 사고로 영국인 44명(선원 42명·동승 아내 2명)이 실종됐다. 놀랍게도 더비셔호는 배의 종류, 화물, 심해수색, 투쟁 캠페인 등 스텔라데이지호와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유일하게 다른 하나는 침몰 원인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국민일보는 더비셔호 참사 40주기를 맞아 영국에 있는 램버트씨와 ‘줌’ 화상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억센 영국식 사투리와는 달리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한 사람이었다. 40년 전 꿈많던 20대 청년이 동생의 죽음을 추적하는 데 청춘을 바친 이유는 간단했다. 왜 동생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지, 왜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있는지, 재난 뒤에 가린 진실은 무엇인지. 그는 그저 알고 싶었다.

폴 램버트(왼쪽 화면) 더비셔호 가족대책위원회 대표가 국민일보 취재진과 '줌'으로 화상인터뷰를 하고 있다. 가운데는 통역 김영철씨.

침몰 전 더비셔호의 모습. 폴 램버트씨 제공

침몰 전 스텔라데이지호의 모습

-스텔라데이지호가 지구 반대편 남대서양에서 침몰했듯 동생이 사라진 일본 근해도 영국을 기준으로 하면 지구 반대편이다.

“공황에 빠졌다. 처음에는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도, 생존자가 전무하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다. 타이태닉과 마찬가지로 절대 침몰할 수 없는 배였다. 선원들이 탈출해 섬에 머물고 있거나 지나가던 고기잡이배가 구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고기잡이배에 올랐지만 영어가 통하지 않아 생사 확인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 어디에든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가족처럼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감정의 폭풍이 휘몰아친다. 죄책감에 시달려 잠을 잘 수도 없다. 어떤 부모는 차라리 잠을 자다 죽어 자식 곁으로 갈 수 있기를 매일 바란다고 했다. 시간이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말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고통이 지속된다.”

-사고 한 달 뒤 가족들은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공식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더비셔호는 영국에서 만들고, 영국 선주가 소유한 영국 배였다. 실종된 선원 44명 모두 영국인이었기에 당연히 국가가 공개 조사를 하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건조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배였다. 선원들도 경험이 많고 노련했다. 그런데 정부는 침몰 원인이 태풍이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할 테니 공개 조사는 없을 거라고 했다. 정부 반응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원인을 숨기려는 것 같았다. 선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원의 목숨은 돈을 들여 조사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1972∼1990년까지 6주에 한 척꼴로 배가 가라앉았다. 수천명이 죽음에 내몰렸는데 아무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에겐 안전보다 이익이 중요했다.”

더비셔호 가족대책위원회 캠페인 모습. 폴 램버트씨 제공

2018년 9월 15일 더비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이 영국 리버풀에서 열린 추모비 제막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폴 램버트씨 제공

-더비셔호의 자매 선박에서 결함이 속출하자 그제야 정부는 첫 번째 공식 조사에 들어갔다.

“원인을 덮으려고만 했다. 가족들은 조사관에게 더비셔호와 관련된 모든 증거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는 이 증거들을 살펴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느낌이었다. 조사관은 우리가 데려간 전문가에게는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라고 종용했고 선주 측 전문가는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내버려 뒀다. 당시 야당인 노동당은 정부가 눈속임한다고 지적했다. 언론도 같은 비판을 쏟아냈다. 조사하는 척하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리라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이 직접 캠페인에 나섰다.

“캠페인 초반 가족들은 더비셔호의 선주, 조선소를 비롯해 정부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일반 대중, 언론, 해운노동조합 그리고 뱃사람들의 응원과 지지가 있었다. 가족들은 우선 해운노조를 통해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ITF)과 접촉했다. ITF는 배를 찾기 위해 80만 파운드(약 12억원)를 모금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돈으로 결국 침몰 14년 만에 배의 위치를 알아냈다.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쏟아졌다. 정부가 추가 수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임명한 전직 판사도 가능한 많은 증거를 모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정부도 뒤늦게 심해수색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용은 영국 정부와 유럽연합이 각각 100만 파운드씩 부담했다. 심해수색을 통해 14만7000여장의 사진과 200시간짜리 영상을 확보했다. 이 증거는 추후 원인 규명의 키가 됐다.”

-당신은 ‘더비셔호의 영웅’으로 불린다. 원인 규명까지 20년이 걸렸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

“나는 영웅이 아니다. 참사 원인을 알아내겠다고 죽은 동생에게 약속했고, 그것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이 왜 죽었는지 정확한 원인을 알 권리가 있다. 우리는 당시 그 권리를 부정당했다. 두 번의 심장마비가 왔다. 마음이 아프다고 죽지는 않는다고들 하지만 마음 아파 죽을 수도 있다. 더비셔호 사고로 아들을 잃고 건강이 나빠져 죽은 부모도 있다.”

더비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영국인 선원 피터 램버트씨. 폴 램버트 대표의 막내동생이다. 왼쪽은 당시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 폴 램버트씨 제공

2018년 9월 15일 영국 리버풀에 조성된 더시셔호 참사 추모비와 추모공원의 모습. 참사 피해자 44명의 넋을 기리는 공간이다. 폴 램버트씨 제공

폴 램버트(맨 왼쪽)씨 등 더비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이 진상규명에 힘쓴 공로로 메달을 받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폴 램버트씨 제공

-당신을 여기까지 이끈 원동력은 뭔가.

“동생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다. 항해를 마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동생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깨닫는 데 무척 오래 걸렸다. 가족이 병을 앓다가 죽으면 마음 아프겠지만 그래도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진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으면 마음의 준비도 없이 헤어져야 한다. 정부가 책임지려 하지 않으니 나라도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한국의 스텔라데이지호, 세월호 가족들이 진실을 향한 당신의 발자취를 밟고 있다.

“그들의 용기와 헌신에 찬사를 보낸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을 송두리째 바쳐야 한다. 더비셔호 침몰 원인이 밝혀진 뒤 선박 안전에 대한 20가지 권고사항이 법제화됐다. 스텔라데이지호와 세월호도 진상을 밝히고 나면 안전이 더욱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이 중요성을 깨닫기 바란다. 우리처럼 삶을 포기하고 캠페인을 오래 지속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2017년 4월 17일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해 광화문 광장 집중유세 현장으로 향하던 중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 위로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경수 경남도지사. 뉴시스

2017년 5월 20일 하승창 전 청와대 사회혁신수석(가운데)이 고민정 당시 부대변인(왼쪽)과 함께 서울 종로구 청운동사무소 앞에 있는 스텔라데이지호 농성장을 방문,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스텔라데이지호 진상 규명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가장 중요한 건 공개 조사다. 가족이 꼭 참여해야 한다. 정부는 진상조사에 전문가들은 참여시키지만, 유족의 개입은 막는다. 처음부터 가족 대표 1∼2명이라도 모든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회의에 참석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정보도 공유돼야 한다. 가만히 앉아 정부가 무슨 말이든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 가장 나쁘다. 당시 영국 정부는 전면 재조사를 하면서 가족들이 심해수색에서 얻은 모든 증거자료를 볼 수 있도록 했다. 가족들은 조사를 진행할 개별 전문가팀을 꾸렸고, 정부가 비용을 댔다. 예산이 부족하면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국제해사기구(IMO)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고통받지 않아야 할 이들이 더는 고통받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

-재난 피해자로서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는.

“스텔라데이지호 2차 심해수색이 그저 가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선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길 바란다. 피해자들이 어떤 아픔을 겪었을지 생각해보고, 자식이 그 배와 함께 침몰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제발 예산을 확보해 진상조사를 하라고 간청하고 싶다. 그래야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을 밝힐 수 있다. 한국 시민들에게도 지지를 요청한다. 가족들은 지금 진상 규명을 넘어 국적, 인종, 종교, 정치와 관계없이 안전사회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심해수색을 통해 밝혀질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한국인들의 도움과 지원이 절실하다.”

박장군 기자 genera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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