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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女히어로는 없었다… ‘보건교사 안은영’

주체적 女캐릭터… “완성되지 않은 여전사 성장기”
형형색색 ‘젤리’로 몽환적 분위기 연출
판소리·봉숭아물·사찰… 한국적 색채 녹여


계단에 널브러진 형광 액체 괴물과 공중을 떠다니는 흐물거리는 반투명 물체. 오색빛깔 젤리들이 몽글몽글 화면을 메웠다가 날카로운 이빨 수천 개를 가진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하면 분위기가 고조된다. 젤리의 공격을 받은 학생들의 눈빛이 흐릿해지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면 전사의 운명을 타고난 안은영(정유미)은 플라스틱 칼을 집어 든다. 은영의 승리로 괴물이 사라진 후 팝콘처럼 하트 모양의 젤리들이 ‘폭’ 터져 나올 때는 희열감이 든다.

안은영은 이런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보는 세상은 비밀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XX” 시작부터 파격적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 25일 전 세계 동시 공개됐다.


히어로女와 충전기男의 기발한 관계성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세랑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정 작가가 창조한 ‘선한 어른들이 아무 대가 없이 학생들을 지키는 이야기’를 이경미 감독이 ‘완성되지 않은 여전사가 비로소 본인의 능력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이 드라마는 고등학교 보건교사 안은영이 욕망의 잔여물인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이용해 학생들을 구하는 코믹 히어로물이다. 은영은 누군가를 구해야 하는 운명을 귀찮아 하지만 막상 오염된 젤리가 나타나면 무지개칼과 비비탄총을 망설임 없이 꺼내 든다. 어느 날 학교 지하실 봉인이 풀리면서 젤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은영은 보호막에 둘러싸인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가 자신의 배터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외로운 세상을 살아낸 은영과 불편한 다리를 통 넓은 바지로 감추고 살아온 인표는 불완전한 어른이다. 이들의 상호보완성이 관계의 핵심이다.

은영은 영웅이고 인표는 충전기다. 지금까지 여성은 남성 영웅 옆에서 내조를 하거나 민폐를 끼치는 역할을 맡았지만 이런 클리셰를 정면으로 부순다. 은영은 용감함과 당돌함을 고루 지닌 인물로, 한국 콘텐츠에서는 드물었던 강력한 여성 캐릭터다. 주체적인 은영은 작품 속 여성 서사의 전환점이 될 예정이다.


원작 속 욕망의 흔적 ‘젤리’, 어떻게 구현했나

드라마의 핵심은 젤리다. 정 작가는 “생각과 욕망의 잔여물”이라며 “욕망만큼 순수하면서도 오염되기 쉬운 게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달팽이가 지나가면 점액질이 남는 것처럼 생명체의 욕망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아있는 물질을 보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까 하는 상상에서 출발했다”고 전했다.

작품 속 세계관에서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은 젤리를 만들고, 오염된 젤리에 현혹된 사람은 불행에 빠진다. 현실에 실존하지 않는 젤리를 어떻게 영상화할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 감독은 치열한 연구 끝에 합격점을 얻어냈다.

1953년 조셉 페인 브레넌의 소설에서 최초로 등장한 슬라임부터 ‘포켓몬스터’의 메타몽까지 슬라임 계보를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이어 물이끼, 나무 수액 등 생물의 특징을 연구하면서 젤리의 큰 방향성을 잡은 후 움직임과 모양새를 구체화했다.

새로운 규칙도 만들었다. 이 감독은 “무해한 젤리는 투명하게 표현했고, 오염된 젤리는 불투명하면서 위험한 동식물처럼 화려한 색을 입혔다”며 “젤리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서 ‘우리의 젤리는 어떨까’하며 역추적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적 색채 짙게… K드라마 도약한다

‘한국스러움’의 유기적 결합도 화제다. 이 감독은 “원작에 이국적인 판타지 요소와 한국적인 소재가 이미 잘 어우러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명승지 사찰이나 남산타워의 자물쇠 등에서 인간의 소원을 흡수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은영의 모습을 원작에서 가져오고,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느라 사시사철 봉숭아 화분을 키우는 은영의 집, 동네 할머니들로 북적거리는 화수(문소리)의 침술원 등 토속적인 디테일을 추가했다. 이 감독은 “한국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음악적 섬세함도 돋보인다. 민요와 판소리 등을 접목한 사운드가 해외 시청자에게도 신선하게 다가가고 있다.


섬세함의 끝… 오브제 숨겨진 의미 들여다보니

이 감독은 은영을 ‘완성돼 가는 여전사’로 설정했다. 젤리를 무찌를 때 사용하는 무지개칼과 비비탄총에 메소포타미아 여신의 별과 아테나의 날개 등 신화 속 여전사의 상징을 더하며 의미를 쌓았다.

은영의 의상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은영은 주로 터틀넥을 입는다. 젤리 때문에 생긴 흉터를 가린다는 설정에서 시작됐다. 비닐 소재의 보건교사 가운은 은영을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이다. 언제든 달릴 수 있도록 발이 편한 운동화도 전쟁터를 누비는 은영의 일상을 반영했다.

공간도 여러 연구를 거쳐 구현해냈다. 보건실 캐비닛 안에는 부적부터 십자가까지 각국 종교 아이템이 배치됐다. 은영이 에너지를 충전할 때 사용하는 소품들이다. 남모르게 젤리 퇴치를 이어가는 은영의 삶을 캐비닛 안에 녹여냈다.

학교에 숨겨진 비밀은 설립자인 인표 할아버지 서재를 통해 비유적으로 담아냈다. 조명을 낮추고 책과 소품을 가득 채우면서 무수한 미스터리가 가득 찬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을 완성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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