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0조…사상 최대 돈 풀렸는데, 최악의 ‘돈맥경화’

역대급 유동성 잔칫 속 자금 흐름 정체 ‘심각’
유동성함정 우려…“자산시장 쏠림 주의, 기업 투자여건 개선”


3100조원. 시중에 풀린 돈이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런데 돈이 돌지 않고 있다. 이른바 ‘돈맥경화’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가계와 기업들은 빌린 돈을 쌓아두고만 있다. 짙은 경기 불확실성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 투자와 소비를 꺼리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경제의 핏줄’인 실물경제엔 돈이 흘러들지 않는데 반해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엔 돈이 넘치면서 자본 흐름의 왜곡 현상은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실물경제와 자산가격 간의 괴리가 커질수록 ‘유동성 함정’에 빠질 위험성도 커진다”고 우려한다.

20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시중의 돈이 얼마나 잘 돌고 있는지 나타내는 주요 지표들마다 일제히 ‘빨간불’이 켜졌다. 지난 8월 기준 예금은행의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15.5회였다. 지난 2분기말(17.1회)보다 더 떨어지면서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85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예금 회전율은 일정 기간 기업과 가계가 은행 계좌에서 돈을 인출한 정도를 나타낸다. 회전율이 낮다는 건 가계나 기업이 돈을 은행에 맡긴 채 놔두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또 다른 지표인 통화유통속도도 심상치 않다. 일정 기간 한 단위 통화가 거래에 사용되는 횟수를 나타내는 지표다. 지난해 말 0.67에서 지난 3월 0.65, 6월 0.62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이화정 수석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대출을 늘리면서 통화유통속도의 하락세가 가속화했다”고 분석했다. 이밖에 ‘통화승수’도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은행들이 신용창출 과정을 통해 얼마만큼의 통화를 창출했는지 보여주는 지표인데, 지난 6월 14.85배로 2001년 12월 통계 집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피가 돌지 않으면 몸이 망가지듯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유동성을 아무리 공급해도 가계소비와 기업투자가 늘지 않는 유동성 함정을 우려한다. 돈이 도는 속도가 느려지면 경제성장률의 회복도 늦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방역완화 조치와 함께 소비와 내수를 거듭 강조한 것도 어떻게 해서든 잠든 돈이 돌도록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로 보인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이 연구원은 “실물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가 미뤄지는 상황에서 주식시장의 쏠림 현상과 부동산시장 과열 등 금융 불균형은 잠재적 위험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코로나19 확산 정도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경기가 쉽게 살아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면서 실물경제에 돈이 흘러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기업들이 새로운 투자에 나설 수 있도록 규제개선 등 적극적인 기업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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