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진범입니다” 1999년 2월 삼례에서 벌어진 일

SBS 창사특집 ‘그것이 알고 싶다’ 3부작 편성

2016년 5월 전북 전주지방법원 앞에서 지난 1999년 완주군에서 발생한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이 사건 재심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1999년 2월 6일 찬바람이 불던 한겨울, 인심 좋은 마을 작은 슈퍼에 강도가 들었다. 인기척에 깬 엄마 최모씨는 불행하게도 강도와 마주 해야 했다. “소리 지르지 마. 새끼와 서방 다 죽일 테니까.” 그래서 엄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깨지 않고 잠들어있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범인은 차분한 경상도 말씨였다. 엄마는 범인에게 돈이 될 만한 물건의 위치를 직접 알려줬다. “제발 살려달라”는 의미였다. 다시 적막이 찾아오자 다른 방에서 자고 있던 고모할머니가 떠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제압 과정에서 노쇠한 노파는 숨지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이 검거됐다. 수상했다. 3명 모두 지적장애인이었고 경상도 말씨도 아니었으며 최씨가 잘못 말한 진술이 그대로 피의자 진술로 둔갑해 있기도 했다. 최씨는 범인이 아니라 확신했다. 이들은 수감 전 하도 두들겨 맞아 너무 아파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노라 울먹였지만, 그대로 구속됐다.

같은 해 11월, 부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3인조 강도가 검거됐는데, 자신들이 삼례 나라슈퍼 강도 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했다. 최씨는 경찰을 통해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범인이 확실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단 사유는 이랬다. “진술이 오락가락하다.” 이들은 각각 징역 3~6년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쳤다.

2015년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지금까지 박 변호사를 거쳐 간 의뢰인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가난하고, 못 배웠으며, 지적장애가 있거나, 자기표현을 잘못한다. 박 변호사는 당시 자백했다는 진범의 전화번호를 받아 들고 며칠 밤을 지새우며 번호를 눌렀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조사 결과 그는 부산 3인조는 진범이 맞았다. 당시 판결은 진범조차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끈질기게 증거를 모았고, 2016년 10월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가 선고됐다. 사건이 일어난 지 17년 만이었다.

SBS 제공

이상한 판결, 억울한 투옥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 춘천 여아 살해사건,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 수원 노숙 소녀 사건…. 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범인으로 지목돼 고역을 치른 무고한 시민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창사 30주년 특집 방송 3부작을 편성하고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회복의 방향을 고민하기로 했다. 24일에는 1부 ‘죄수의 기억 : 그들은 거기 없었다’가 전파를 탄다. 이날 방송에서는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 진범 배모씨와의 인터뷰가 공개된다. 그는 오랜 침묵 끝에 그날의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여전히 배씨처럼 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은 진범이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 조그마한 만화방 주인, 시각 장애인, 그리고 가출청소년까지. 복역 후 카메라 앞에 다시 앉은 죄수들은 사법 시스템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아직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무엇도 충분히 가지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세월을 보냈다. 세상은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법 위의 사람들
한 대기업 회장의 사모님은 당시 감형 없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13년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그가 허위 진단서를 발급받아 6년간 무려 38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호화 병동 생활을 이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7년이 지난 지금, 당시 사모님의 호화 병동 생활을 도왔던 이들은 과연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을까.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죄수들과, 없어도 될 곳에 갇힌 죄수들 간의 간극은 그간 국민의 사법 불신을 키워왔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조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첨예하고 교묘해지고 있다. 사법 시스템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불균형은 대한민국의 숙제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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