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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역사적 국민투표… 군부독재 ‘피노체트 헌법’ 폐기시켜

80% 압도적 찬성… ‘역사의 암흑기와 단절’ 의미
새 헌법 초안 쓸 시민대표 선출 등 예정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25일(현지시간) 밤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하는 쪽으로 국민투표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칠레에서 1980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제정된 ‘피노체트 헌법’이 국민투표로 폐기됐다. 소득의 지나친 불균형 등 사회 부조리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압도적인 다수의 국민들이 변화를 선택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은 25일(현지시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78%의 찬성률로 새 헌법 제정이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칠레 군 총사령관이었던 피노체트는 1973년 9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후 17년간 집권했다. 국민 다수가 피노체트 연임에 반대한 1988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1990년 3월 피노체트는 물러났지만, 피노체트 시절의 유산은 계속 남아있었다.

칠레의 소득 불균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심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독재가 결합된 피노체트 헌법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연금과 보험, 교육 등을 시장에 맡기면서 극심한 빈부 격차를 낳았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을 충분히 명시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됐다.

지난해 10월 칠레 수도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이 촉발한 대규모 시위는 칠레에 만연해 있던 문제점을 드러냈다. 시위는 교육, 의료, 임금, 연금 등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불만으로 확대됐다.

중도우파 성향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새 헌법 제정에 부정적이었지만 시위에서 30여명 이상 숨지는 등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되자 결국 국민투표 시행에 합의했다. 투표는 당초 지난 4월로 예정됐다가 코로나19로 한 차례 연기됐다.

이날 투표 결과로 40년 묵은 현행 헌법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칠레 사회와 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일각에선 칠레가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 비해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현행 헌법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새 헌법이 실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헌법 제정 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왔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은 ‘부조리한 안정’ 대신 ‘변화’를 택했다. 칠레 역사의 암흑기인 피노체트 시절과 단절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피녜라 대통령은 “이 투표는 끝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의 시작점”이라면서 “지금까지는 헌법이 우리를 분열시켰지만 오늘부터는 새 헌법이 우리 모두의 집이 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칠레 국민들은 내년 4월 새 헌법 초안을 쓸 시민 대표들을 직접 뽑고 2022년 또 한 번의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 초안을 수용할지 결정하게 된다.

NYT는 “새 헌법은 경제, 정치 등의 분야에서 칠레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데 더 큰 융통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면서 “새로운 헌법은 헌법재판소의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며 교육 정책과 선거 제도, 개헌 등에 관한 법률은 압도적 다수의 승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고 전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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