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여성이 이끌고 ‘모두’ 공감하는 이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코로나19 극장가 효자 노릇
고아성 이솜 박혜수 호흡이 백미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1995년 토익 600점을 넘겨 대리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말단 여직원들이 회사 토익반에 모인다. 실무는 최고인데 잔심부름에 허덕이는 자영(고아성), 촌철살인이 매력인 유나(이솜), 수학왕 보람(박혜수)은 승진의 꿈에 부푼다. 하지만 희망도 잠시 이들은 하수구로 흘려보낸 페놀에 물고기들이 떼 지어 죽은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토익이 아닌 회사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뜨거운 연대를 무기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도 굴하지 않고 극장가에 입소문을 타는 이 작품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고졸 출신 여사원 세 명이 회사 비리에 맞서 싸운다는 얼개의 영화로 1991년 벌어진 구미 낙동강 폐수 유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무거운 소재에도 재기발랄한 화법과 레트로 감성으로 21일 개봉부터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현재까지 35만8620명을 동원해 침체한 극장가 숨통을 틔우고 있는 효자이기도 하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첫손에 꼽히는 매력은 똘똘 뭉친 세 주인공의 모습이다. 배우 고아성 이솜 박혜수는 저마다 캐릭터를 살려내면서도 끈끈한 호흡을 선보인다. 특히 캐릭터마다 탄탄한 서사와 개성을 지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일종의 탐정극을 보는 듯한 묘미를 적절히 살려냈다. 자영은 발로 뛰어가며 사건을 추적하고 유나는 폭로의 물밑 작업을 도맡는다. 타고난 수학 천재인 보람이 하수구 크기와 폐수 속도로 전체 방출량을 계산하는 장면은 극의 백미다.

‘여성의 연대’가 중심에 놓인 복고풍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써니’(2011)를 얼핏 떠오르게도 한다. 꼭 레트로 감성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여성들의 연대를 그려낸 영화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런데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근래 여성 영화가 늘 시달려야 했던 악의적 비방이나 평점 테러에서도 자유로운 작품이어서 특히 눈길을 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앞서 개봉한 코미디 액션 ‘걸캅스’ ‘82년생 김지영’ 등 여성이 전면에 선 영화들은 개봉 이전부터 별점 테러의 희생양이 됐다. 특히 ‘82년생 김지영’을 향한 비방의 강도는 대단했다. 조직적인 평점 테러와 불매운동은 물론 주연 배우들의 SNS에도 악성 댓글이 쏟아졌다. ‘캡틴 마블’ 등 해외 블록버스터 영화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삼진그룹 토익반’의 네이버 포털 평점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 네티즌 평점은 여성 9.47점·남성 7점으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관람객 평점에서는 남성 9.59점·여성 9.48점으로 오히려 남성 평점이 더 높다. 영화를 봤다면 누구든 고개를 끄덕이고 좋아할 만한 영화라는 얘기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갑을관계 전복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덕분이다. 영화는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 영화를 모든 약자들의 연대와 승리에 관한 이야기로 더 조명한다. 여성을 향한 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상을 담담히 담아내는 방식도 눈에 띈다. 세 주인공은 뛰어난 능력에도 커피 타기, 구두닦기에 동원된다. 건조기를 만들고픈 자영, 마케팅 업무에 탁월한 유나이지만 누구도 관심이 없다. 보람은 유흥업소에 간 남자직원 영수증을 메꾸는 일을 한다. 가끔은 에둘러서 표현하는데 가령 토익반에 모인 여직원들이 대뜸 “보이즈 비 앰비셔스!”(소년이여 야망을 품어라)를 외치는 식이다. 시대의 초상은 현재에 대한 반추로도 슬그머니 이어진다.

꼼꼼하게 구현된 복고 콘셉트도 관객의 공감대를 높이는 요소다. 1990년대 배경에 맞춰 미술팀과 소품팀은 토익 교재는 물론 컵라면 포장지까지 직접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앨범과 영상자료를 참고해 동묘 시장 등에서 복고풍 의상을 구했다. 영어의 ‘th’ 발음을 비롯해 거칠면서 정직한 영어 발음도 듣는 재미가 있다.

특히 총제작비 약 80억원 규모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이룬 흥행은 대형 블록버스터도 코로나19에 맥을 못 추는 극장가에서 이룬 성과여서 의미가 있다. 사실 후반부는 판타지에 가깝다. 그런데 줄기차게 나오는 소소한 웃음과 눈물 사이로 마음은 뿌듯하게 차오르는 작품이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