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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김기창은 박래현에게 햇볕이었나 그늘이었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박래현, 삼중통역자’전

‘글쎄, 이런 시대가 올까. (중략) 1. 여성들은 외부에서 활동하게 될 테니 지금까지 해오던 가사를 위탁하고 싶다. 2.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불리했던 법정. 법의 개정을 실행하고 싶다. 등등’
박래현, '영광', 1966-1967, 종이에 채색, 134x168cm. 박래현이 1960년대 초 해외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개척한 추상화 연작.

결혼 2년 차 주부 박래현(1920∼1976)이 1947년 여성 잡지에 쓴 글이다. 가정과 작업을 양립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 담겨 있고, 그만큼 강했던 작가로서의 자의식과 열망이 읽힌다. 그런데도 지금 ‘청각 장애를 가진 천재 화가’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로 더 많이 인식되고 있는 박래현의 삶과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에서다. 85년 10주기 전시 이후 개인소장 대표작들이 대거 나왔다.

평안남도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일본 동경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해 일본화를 전공하던 박래현은 재학 중이던 1943년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았던 재원이었다. 상 받으러 귀국했다 당시 화단에서 이미 추천작가 반열에 오르며 스타 화가로 있던 36세의 김기창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집안에서 격렬히 반대했지만 47년 결혼을 감행했다. 이때부터 매년 부부 전을 개최한다. 6년 중단 시기를 제외하면 1971년까지 국내외에서 총 12회의 부부 전이 이어졌다. 57년부터는 동양화가 친목 단체인 백양회에도 남편과 함께 참여했다.
'노점', 1956년, 종이에 채색, 267x210cm. 1956년 국전에서 대통령 상을 받은 입체주의 화풍의 작품. 막내딸을 막 출산해 네 아이의 엄마가 된 시점에 제작했다.

일련의 전시를 통해 박래현의 작품 세계는 혁신에 가까울 만큼 변신한다. 일본에서 사실주의적 채색화를 배웠지만, 과감히 버렸다. 해방 후 피카소에 심취해 입체주의 화풍의 한국화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56년 5회 부부 전에 출품한 작품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 대통령상을 받고 넉 달 뒤에는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받기까지 했다. 당시 젖먹이까지 둔 네 아이 엄마였지만 자신의 키보다 큰, 2m나 넘는 대작을 작업실에 두고 붓을 휘둘렀을 화가 박래현을 상상하면 울컥해진다.
작업을 하고 있는 박래현.

화풍은 또 변신한다. 61년 백양회 해외 순회전을 계기로 아시아와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미래의 미술이 추상화에 있음을 확신한 박래현은 62년부터 추상화의 길을 개척한다. 구불거리는 갈색 띠가 화면 전체를 채우고 그사이를 강렬한 붉은 색과 검은색이 메우고 있는 추상화 연작은 인간이 남긴 고고학적 유산의 상징 같다. 그런데도 화단에서 ‘엽전 시리즈’ ‘맷방석 시리즈’ 등으로 폄하돼 불렸다. 규모가 큰 추상화 작품을 가지고 지금 한국의 추상화를 대표하는 박서보, 이응로, 서세옥, 정상화 등 선후배 남성 화가들과 전시도 함께 했지만, 지금 박래현을 추상화 작가로 기억하는 대중들은 많지 않다.

변신은 계속된다. 그는 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걸 계기로 미국에 남아 판화와 태피스트리를 배웠다. 74년 귀국 후에는 동양화에 판화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작품과 태피스트리 추상 작품을 제작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병마로 인해 56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화가 인생도, 새로운 실험도 중단되고 만다.

이번 전시는 추상화 판화 태피스트리 등 덜 조명된 박래현의 작품 세계를 온전히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었다. 전시 제목도 그래서 삼중통역자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그는 왜 부부 전을 고집했을까. 남편과 함께한 전시를 통해서만 자신을 알린 것은 득이기만 했을까, 그늘은 없었을까. 당대 유명화가였던 김기창과 동시에 무대에 올려짐으로써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실상은 조연이지 않았을까.
박래현, 김기창 합작 '봄C', 1956, 종이에 수묵채색, 167x248 cm. 박래현이 나무를, 김기창이 새를 그렸다.

아름드리 등나무에 새들이 놀러와 지저귀는 부부 합작 그림 ‘봄 C'. 이 동양화에서 박래현이 그린 것은 새가 아니라 힘찬 필치의 등나무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가 새를 그렸을 것으로 지레짐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미술관 측은 “이번 전시를 통해 김기창의 아내가 아닌 예술가 박래현의 성과를 조명함으로써 그의 선구적 예술 작업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비평적 관심을 환기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내년 1월 3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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